글을 쓰는 날짜 기준으로 만 사천여 일. 우리가 ‘절친’으로 지낸 기간이다. 그녀와 나는 같은 유치원과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서예 학원과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을 함께 다녔다. 국내외의 좋은 풍경을 보는 시간을 공유하였고, 같이 본 영화, 뮤지컬, 연극은 무수히 많다. 떡볶이 맛집을 알게 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기도 하다. 둘이서 찍은 사진은 세 본 적도 없고 셀 수도 없지만, 아마 수만 장은 족히 넘지 않을까? 전화번호 뒷자리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까지 같다. ‘영혼의 단짝’과도 같은 그녀는 바로 내 하나뿐인 동생이다. 성격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르지만 엄마 배를 시간차를 두고 공유한 사이인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나와 함께 했다.
나이는 두 살 차이, 하지만 학년은 한 학년 차이(동생은 1월생이라 학교를 빨리 갔다). 어릴 때는 어디든 쫓아오려던 그녀가 귀찮고 친구들이랑 노는 것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각자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고 뒤이어 고등학교까지 달라지자 서로 간의 적정 거리가 유지되었다. 친구들과 놀 때와 동생과 놀 때가 자연스레 나뉘어 나의 여가시간을 두 배로 풍요롭게 했다.
취향은 같은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H.O.T 팬일 적에도 나는 장우혁을, 그녀는 토니를 좋아했다. 똑같은 뮤지컬에 열광하더라도 애정하는 넘버는 다르다.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같은 취미를 가지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취미짝꿍이기도 하다.
남들만큼은 아니었지만 우리도 종종 별것도 아닌 일로 싸웠다. 체형은 비슷하나 선호하는 스타일이 달라서 자매가 가장 많이 다투는 원인인 ‘옷’ 때문에 싸울 일은 별로 없었다. 태권도를 배웠던 나와 도장 근처에는 실수로도 가지 않은 그녀인지라 같은 체급임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보통 서로가 삐져서 말을 안 하다가 은근슬쩍 화해하거나, (맞는 말이긴 하지만 듣다 보면 열받는) 내 말에 상처받아 동생이 눈물만 뚝뚝 흘리면 갑자기 나도 죄책감이 밀려와서 서로 잘못했다고 하고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머리가 굵어지고 우리는 그래도 자매치고는 많이 안 싸웠다는 얘기를 하자, 친구들이 언니랑 싸웠다고 하면 겉으로는 “속상하겠다.” 위로하면서도 속으로는 ‘언니랑 왜 싸우지? 언니랑 싸우면 내가 더 손해인데!’라고 생각하곤 했다며 웃었다.
키크니 작가의 전시회에서 재연해 봄
부모님께 감사할 일은 차고 넘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감사한 것은 동생을 낳아준 일이다. 기쁜 일은 나눌 사람이 많았지만, 슬프고 힘든 일은 ‘남’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덕분에 나는 덜 외롭고, 덜 슬펐고, 더 위로를 받고,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남편은 매일 야근 아니면 출장이었다. 남들처럼 뱃속의 아이가 먹고 싶어 하니 이거 사 오라, 저거 사 오라 할 수 있는 존재 자체가 옆에 없었다. 널뛰는 호르몬 탓에 한층 더 서러웠던 그 빈자리를 메워준 사람이 바로 내 동생이었다. 퇴근하는 길에 굳이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야 하는 신혼집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육포와 샌드위치, 마카롱 같은 간식들을 “오다 주웠다”며 쿨하게 투척했다. 그냥 사다만 주면 안 먹을까 봐 자기 눈앞에서 먹으라고 하고, 내가 감격에 겨워 먹는 동안 자기 방 청소는 안 하는 주제에 몸 무거운 언니네 집 청소는 해주고 돌아갔다. 지금도 감히 말하자면 나를 제외하곤 우리 아이들을 가장 예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동생이 아이를 낳으면 나는 그녀가 내 아이들에 했듯이 그렇게 사랑을 쏟아붓지 못할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기력도 떨어지다 보니 적당한 예의를 차려야 하는 친구와의 만남도 좋지만, 막 대하는 것 같아 보여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자연스레 지킬 수 있는 동생과의 만남이 훨씬 편할 때가 많다. 서로에 대해 모든 걸 너무나 잘 아니까 의견을 조율하는 번거로운 과정 없이도 모두가 원하는 결과로 최적화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 같이 여행 갈 때 짐을 제대로 챙겼는지 걱정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 오히려 그녀의 캐리어 안에서 내가 놓고 온 것을 같이 쓸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녀와 함께 하면 편하고 좋고 안심이 된다.
아,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같이 다니면 자매냐는 질문 보다 친구냐는 질문을 월등히 많이 받는 사이니 내 ‘절친’이라 하기에도 한 점 모자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