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가성비 문화생활 6편
새해 첫 영화는 아니지만, 기대 없이 봤다가 그 매력에 속절없이 빠지고야 만 영화가 있어서 2025년 첫 '직장인의 가성비 문화생활' 시리즈는 이 영화로 문을 열었다.
<더 폴 : 디렉터스 컷>(이하 더 폴)
뒤에 붙는 '디렉터스 컷'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원래 2006년 (한국에서는 2008년)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란 이름으로 선보인 영화를 감독판으로 재개봉 한 작품이다.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하였지만, 2024년 12월에 재개봉한 후에는 입소문을 타고 n차 관람했다는 후기마저 심심찮게 보이고 있다. 그 정도까지의 열정은 아니래도 나 역시 119분의 제법 긴 러닝타임 동안 한 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스포일러는 최대한 배제하려 하였으나, 일부 내용은 서술을 위해 직,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무성영화 시대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스턴트맨 ‘로이’는 같은 병원에 입원한 호기심 많은 어린 소녀 ‘알렉산드리아’와 친구가 되고, 매일 다섯 무법자의 환상적인 모험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기는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면서 ‘알렉산드리아’를 신비의 세계로 데려간다. (출처 : CGV)
로이와 알렉산드리아는 둘 다 '추락(the fall)'을 이유로 병원에서 만나게 된다.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들고 신나게 병원을 누비는 알렉산드리아와는 달리, 꿈도 잃고, 건강도 잃고, 사랑마저 잃은 로이에게 희망은 없다. 처음에는 로이를 경계하던 알렉산드리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 이유도 거동이 불편한 자신 대신 약을 가져오게 시키려고 함이었다.
아직 어린 알렉산드리아는 로이가 해주는 다섯 무법자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을 자기 주변 사람들로 대입해서 듣는다. 아침드라마 뺨치는 끊기 신공을 가지고 있는 로이의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의 상상력을 먹고 무럭무럭 커진다. 흥미진진한 모험기가 진행될수록 둘은 점점 가까워진다.
아역배우 캐스팅에만 9년이 걸렸다는데, 타셈 싱 감독은 루마니아에서 '카틴카 언타루'를 만나는 순간 비로소 이 영화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고 했다. 그만큼 이 꼬마와 꼬마의 상상력은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알렉산드리아 역을 맡은 '카틴카 언타루'는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럽고... 아무튼 이 역할에 찰떡이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잘생긴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스토리가 엉성해도 참고 볼 수 있다. 안구정화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로이역의 '리 페이스'의 페이스 때문에 더 재미있었다. 특히 맹세하는 장면에서 진실의 미간과 이두박근! 시력이 0.1 정도는 좋아진 느낌이다.
주인공 얼굴 뿐만 아니라 영상미까지 뛰어나니, 저절로 집중이 되었다. 아! 그렇다고 이 영화의 스토리가 별로라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금물이다. 단지 영상미의 수준을 따라잡기엔 좀 아쉬웠을 뿐.
4년에 걸쳐 전 세계 24개국, NO CGI로 촬영한 믿을 수 없는 황홀경
18년 만에 4K로 부활한 영상미학의 궁극
"극장에서 안 보면 땅을 치고 후회한다"라는 관람평이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뛰어난 영상미에 있다. 확실히 큰 화면으로 보니 더 빠져드는 것 같다. 원래 좋은 건 크게 봐야 한다. 웬만하면 비싼 영화관에서는 보지 않는 편이지만, <더 폴>을 용아맥에서 상영해 준다면 돈 주고 볼 의향 100% 있다. (CGV 보고 있나? 제발 특별상영 해주세요.)
한국에서의 흥행 열풍에 힘입어 내한한 타셈 싱 감독은 간담회에서 "아무리 훌륭한 특수효과를 써도 시간이 지나면 구식으로 보인다. (중략) 이 영화를 제작할 때 제가 선택한 로케이션들은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이런 공간에 CG를 쓰면 모자 위에 또 모자를 쓴 것 같은 느낌이라 쓰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출처 : 씨네플레이 : http://www.cinepl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106 )
그는 유명한 CF감독이었다. 광고를 촬영하면서 전 세계 곳곳에 숨겨진 장소들을 무려 19년에 걸쳐 점찍어놨다. 그러다가 사랑에 버림받고 (이래서 로이의 마음을 더 잘 묘사할 수 있었나!) 전 재산을 털어 만든 영화가 바로 <더 폴>이다. 히말라야의 판공 호수, 인도의 라다크 레 람비르 포르 평원, 아르헨티나의 식물원,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 등 전 세계 24국을 돌아다니며 4년간 촬영했다.
18년이 훌쩍 넘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영상은 역시나 인위적인 맛이 없기 때문일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CG가 사실적이라 하더라도 '진짜'를 따라갈 수는 없다.
사막과 섬과 호수와 하늘.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들이 존재하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갈 곳도 많다.
각자의 특색이 잘 드러난 의상도, 어딘가 모르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주는 건물들도 강렬한 원색과 대칭 구도를 이용하여 눈을 즐겁게 한다. 이런 장소들이 실재한다는 게 더 환상적일 따름이다.
유명한 미술 작품을 연상시키는 장면들도 많기 때문에 영화와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이는 스포일러가 될 소지가 다분하여 아쉽게도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겠다. 다만 오랜 시간 사랑받은 명화들처럼, 이 영화 또한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어느 장면에서 멈추더라도 액자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멋진 장면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인도 라다크 평원에서 사흘간 체류하며 풍경과 윤곽을 맞춰 촬영했다던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동화가 언제나 착한 것은 아니다. 상상이 언제나 해피엔딩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희망은 어느 상황에서나 있다. '어른들의 동화'가 영상미를 입고 현실을 구원하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이 멋진 영화가 재개봉되기까지 18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당장 사이트를 열어 예매하기를 권한다. 이번에 내리면 언제 또 영화관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참고로 오늘부터 선착순으로 주는 굿즈가 매우 탐이 난다. 감독님 너무 깜찍한 거 아닌가요?)
*영화의 줄거리 및 스틸컷의 출처는 모두 CGV ([더 폴: 디렉터스 컷]<영화상세 < 영화 | 깊이 빠져 보다, CG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