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이 근처 맛집 알아놨어."
"아냐, 내가 잘 아는 맛집이 있거든. 여기서 조금만 걸으면 되니까 거기로 가자"
내가 짧지 않은 이십 년을 살면서 김밥천국이 맛집이라는 사람은 보다 보다 처음이었지만 어쨌든 이미 나는 충분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간이 덜 된 밍밍한 떡볶이와 옆구리 터진 참치 김밥을 먹으면서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밥을 얻어먹었으니 차는 자기가 주겠다며 커피숍이 아닌 자기가 공부하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이때부터 살짝 이상했지만 그래도 나는 친구를 믿었다. 하지만 옛 어른 말씀이 틀린 것 하나 없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바로 그 말.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어 들어간 다세대 주택은 어둡고 조용했으며 이상한 향내도 났다. 자기 방이라며 들어가라는 곳에는 이상한 그림과 작은 상만 있었다. 이게 스무 살짜리 여자애가 사는 방이라고? 십 년째 사법고시 준비하는 고시생이래도 이렇게는 안 해놓고 살겠다!
뭐 마시겠냐고 물어보는 친구한테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녹차를 주문했다. 당황하는 친구한테 나는 차는 뜨겁게 밖에 안 마신다며 우기고 어서 물을 끓여 오라며 친구를 방에서 내보냈다.
'이 노무 기지배가 날 얼마나 우습게 봤길래!' 분노를 장전하고 핸드폰을 꺼내 알람을 설정했다.
오 분 간격으로 다섯 개.
땡땡이가 차를 가지고 와서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려는데 요란하게 벨이 울렸다. 자연스럽게 전화인 척 받으며 연기를 시작했다.
“뭐? 조모임이 오늘이었다고? 진짜? 몇 시? 땡땡아, 지금 몇 시야? 알았어! 나 금방 갈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 내가 듣는 수업들은 다 조별로 발표하는 게 있거든. 그래서 조모임이 수시로 있어. 출석도 점수에 들어가서 절대로 빠지면 안 되거든. 너 만난다고 들떠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나 빨리 가야겠다."
내가 부산을 떨며 일어나자 당황한 땡땡이는 황급히 나를 붙잡았다.
"내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잠깐만 더 있으면 안 돼?"
"응, 안 돼. 지금도 봐. 또 전화 오잖아. 그래그래, 알았다니까. 나 지금 가!"
급하게 서두르다 실수인 척 가방을 휘둘러 방에 있던 책을 향해 차가 든 컵도 쓰러트렸다.
"미안. 중요한 책인 거 같은데 너는 얼른 이거 치워. 나는 혼자 갈 수 있어. 아까 왔던 길로 가면 되지?"
후다닥 신발을 챙겨 신고 왔던 방향과 반대편 골목길에 숨어서 알람을 해제하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때, 어떤 여자가 막 뛰어서 그 집으로 들어가더니 곧 땡땡이와 함께 나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역 쪽으로 뛰어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 나는 길을 물어가며 한참을 걸어 다른 지하철역으로 가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리 학교에 전체 쪽지를 돌렸다.
이름 : 이땡땡, 연락처 : 011-2345-6789, 지역 : ㅁㅁ역 근처
얘 사이비에 빠져서 나한테 사기 치려다 걸렸으니까 다들 조심하고 절대 만나주지 마!
그 이후로 땡땡이한테 오해인 것 같다며 여러 번의 쪽지, 전화, 문자 메시지가 왔지만 다 무시했다. 나를 포교하려다 실패한 이후에 다른 친구들에게도 접선을 시도했던 모양이지만 다들 내 경고 쪽지를 받았던 터라 무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땡땡이는 친구 찾기 사이트에서도 탈퇴했다.
한창 힘들고 괴로울 때 그런 틈을 파고들어 포교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때는 ‘오죽했으면 그런데 빠졌을까’라는 안타까움보다는 ‘우정을 빙자해서 감히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해?’ 하는 괘씸함이 더 컸던 것 같다. 땡땡이도 아마 풋내기라 나를 쉽게 놓쳤던 것일 뿐, 그 언니라는 사람까지 가세했으면 나는 꼼짝없이 그곳에 붙잡혔을 것이다. 내가 그곳을 신고 했거나(이런 건 신고 사유도 안 될 것 같다), 땡땡이의 부모님께 연락을 했다고(당연히 연락처도 모른다) 땡땡이가 사이비에서 빠져나왔을 리는 없고, 내가 사이비에 잡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가 싶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아이가 참 안타깝다.
그래도 그거와는 별개로, 저는요! 도를 알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아요!
어쨌든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정말 내 영혼이 맑긴 맑고 조상님이 도우시긴 하나보다’라고 오늘도 정신 승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