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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May 15. 2021

구식의 시대, 그리고 순수의 시대

영화 <순수의 시대> 리뷰

'순수의 시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한 번이라도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순수하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을까?



영화 <순수의 시대>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93년작 영화이다. 남자 주인공인 뉴랜드 아처(Newland Archer) 역에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Daniel Day Lewis), 두 여자 주인공인 메이 웰랜드(May Welland)와 엘렌 올렌스 카(Ellen Olenska) 역에는 각각 위노나 라이더(Winona Ryder)와 미셸 파이퍼(Michelle Pfeiffer)가 캐스팅되어 열연을 펼쳤다. 1870년대 뉴욕 상류층 사회의 위선과 허영, 그 안에서 스러져가는 개인의 모습을 그려낸 이 작품은 그 역시 상류층 출신이었던 작가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의 동명의 소설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순수의 시대>

드라마, 미국 | 136분

감독: 마틴 스콜세지

출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 미셸 파이퍼, 위노나 라이더

개봉일: 1994.09.17.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는 세계에서 지난 50년간 속으로 곪고 있었던 이야기들이었다.


뉴랜드 아처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형적인 상류층 남자이다. 그는 즐거움이 실현되는 것보다 그 즐거움을 느끼기 전의 시간을 더 즐기는 개인적인 면모 외에도 오락과 유희를 절제하는 뉴욕 상류사회의 관습, 그러니까 공연장에 정시에 도착하지 않는 뉴욕의 관습을 따르는 사람이다. 아처 가문과 함께 뉴욕의 양대 가문으로 꼽히는 밍고트가의 처녀인 메이 웰랜드와의 약혼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출신이 의심스러운,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고 있는 사업가 줄리어스 보퍼트가 자신의 응접실에 논란이 많은 누드화를 걸어 놓는 일 같은, 관습에 대한 도전을 속으로는 좋아했다. 다만 겉으로는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과 전통, 관습을 옹호했을 뿐이다.


엘렌은 어린 시절을 뉴욕에서 보냈지만 폴란드의 백작과 결혼하며 '외국인'이 되었다. 그리고 백작과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듯 자신의 고향 뉴욕으로 돌아온다. 같이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생각하며 돌아왔지만 이미 상류층의 관습에 젖은 사람들에게 엘렌은 전통을 깨는 '이방인'일 뿐이다. 엘렌은 줄리어스 보퍼트와 어울리고 '사교장에서 여성이 한 남성과 있다가 자리를 떠서 다른 남성에게 다가가면 안 된다'는 관습을 가볍게 깨버리는 행동을 한다. 이런 엘렌은 곧 사교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며, 이들의 환대는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사실 자신은 섞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중요한 주인공, 메이 웰랜드는 아처와는 다른 의미의 '전형적인 상류층' 여자이다. 아처가 결혼을 서두르고 싶다고 하자 관습대로라면 약혼  1~2 후에 결혼을 해야 한다며, 어머니도 관습을 따르길 원할 거라는 말로 이를 일축한다. 메이는 아처가 보기에 뉴욕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순수한 여자이다. 이런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은 운이 좋은 남자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조차 모르는 메이에게 지쳐가고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엘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스캔들을 일으켜서 당신이 얻을 게 뭔가요? -  자유를 찾죠

엘렌은 이런 사회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유로워질 준비를 한다. 바로 유럽에 있는 남편과 이혼을 하고 소소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남편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과 사회적인 지위 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음에도 '관습'과 '금기'를 깨려는 엘렌을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런 엘렌이 사교계에 멀쩡히 등장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며, 엘렌과 결혼을 통해 사촌지간이 되는 뉴랜드를 걱정하기에 이른다. 뉴랜드는 엘렌에게 묻는다. "이런 스캔들을 일으켜서 당신이 얻을 게 뭔가요? 엘렌은 대답한다. "자유를 찾죠."


아처는 엘렌에게서 자신이 갖지 못한 것, 혹은 저 마음속 깊숙이 가지고 있었으나 꺼내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 연민과 함께 애정의 감정을 품게 된다. 메이와의 약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자신의 감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처, 그런 아처와 마찬가지로 엘렌도 사촌 메이에 대한 죄책감과 아처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다. 결국 이들의 방황과 흔들림은 메이의 임신 소식으로 인해 종결되고 엘렌은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후 메이와 아처는 행복하고 평범해 보이는 상류층 가족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메이의 죽음 후 아처는 다시 한번 엘렌을 볼 기회를 가지게 된다. 아처의 아들이 파리에 있는 엘렌을 찾아가면서 동행하게 된 것인데 평생을 그려왔던 엘렌을 바로 앞에 두고도 아처는 차마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


이 영화를 본건 원작인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의 동명의 소설 <순수의 시대>의 여운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순수의 시대'라는 어구가 좋아서 집어 든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진실과 인간다움이 가려지는지, 그걸 덮는 위선과 허영은 얼마나 허술하며 또 얼마나 촘촘한지, 그 속에서 '깨어 있는' 한 개인은 얼마나 숨이 막힌 채 살아야 하는지를 여실히 공감했다. 1870년대 뉴욕의 상류사회, 그리고 2020년대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 (이 책을 본 건 아마 10년 전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10년대나 2020년대나 사회가 개인을 내리치는 건 여전하지 않은가)는 사실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되려고 애쓰고 있다고요.
당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순수한 사람은 서투르다. 순수한 사람은 순수한 만큼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애쓴다. 그런 애씀은 타성과 관습에 젖어든 사람들이 보기에 우습다. 아니, 사실은 우스운 것으로 치부하려 애쓰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전통과 관습 속에 절어 있는 자신의 삶이 사실은 지루하기 짝이 없고, 그렇게 빛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피해 유럽에서 고향 뉴욕으로 돌아온 엘렌 올렌스카.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이혼을 원하고, 남편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것도 거부한다. 이런 그녀는 뉴욕 상류사회에서 치부로 인식된다. 그녀가 결혼을 통해 '외국인'이 되었으며, 이 외국인이 이제는 '이혼녀'라는 딱지까지 자처하기 때문이다. 아처는 이런 엘렌에게 "법률은 이혼을 편들어 주지만 사회 관습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현실을 일깨워 주려고 한다. 이내 그녀의 순수함과 자신의 순수함을 저버리지 못해 그녀의 편에 서게 되지만.


엘렌은 또 순진하게도 자신과 어울려 지내던 사람들이 예전처럼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고 어색한 분위기에 그만 옷을 핑계로 사교모임도 거절하고 자신에게 가식적이지 않은 보퍼트, 아처와 주로 어울린다. 엘렌은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급기야 자기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되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그녀를 사랑하는 아처는 이야기한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될 수는 없을 것 같아요"라고. 그리고 본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혹은 그 사랑을 지킬 용기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되어 버린다.


이렇듯 순수한 사람들은 투박하다. 표면이 거칠거칠해서 이 험난한 세상을 구를 때마다 깎여나간다. 너무 아프다. 피를 철철 흘린다. 이 세상을 사랑해서 기꺼이 뛰어든 건데 너무 아프다. 그렇게 살이 떼어져 나가고 나서야 둥글어진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나는 이제 괜찮은 걸까? 자신에게 물어본다. 괜찮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제 아프지 않은 걸까? 또 자신에게 물어본다.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진짜 내 모습은 어디에 있는 걸까? 지난 나의 조각들을 살펴본다. 이 조각들은 내가 지나온 길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이 조각들을 주워 담아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놓아둔 채 그저 '구식'이라는 이름으로 스러져야 하는 걸까?


구식이라고만 해라. 그걸로 충분할 거야.


결말로 돌아가 전할 말이 없냐는 아들의 말에 아처는 이렇게 말하고 쓸쓸히 돌아선다. "구식이라고만 해라. 그걸로 충분할 거야 (Just say I'm old-fashioned. That should be enough. Go on.)" 나는 이 한 마디가 영화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여자였지만 그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없었던 이유,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이유 그 모든 게 자신이 '구식'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구식'이기 때문이다. 구식, 전통, 관습이라는 말은 자신답게 사는 일을 그만두는 것을 정당화하는 아주 좋은 핑계이다. 내가 무언가를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 내가 구식이니까.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지키면 안 되는 것, 그렇지 않으면 관습에 어긋나게 되니까. 한 가정을 지키며 나라는 사람을 감춰야 하는 것, 그게 바로 전통이니까. 아처와 엘렌의 희생은 어떻게 보면 숭고하게 보이지만 그 끝은 결국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이 사실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구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조 섞인 말로 끝난다. 그리고 이 자조는 사회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에 더 아프게 들린다.


비단 사회에 짓눌린 것은 아처와 엘렌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몰랐던 메이, 자신의 남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알지만 가족과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아픔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그녀는 전통과 관습, 구식의 또 다른 희생양이다. 누구보다 전통적이고 순수함의 결정체인 듯 보였던 그녀는 사실 위선과 거짓으로 직조된 사회의 치밀한 일원이며 그 거미줄 같은 사회에 걸려 질식하는 또 다른 생명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는 툭 튀어나온 개인을 거부한다. 평평한 마룻바닥에 홀로 툭 솟아오른 작은 못. 어떻게든 그 못을 밟아 고르게 펴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와 같이. 사회와 같이. 그 못은 내리치는 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을까. 얼마나 보이지 않는 피를 흘렸을까. 내가 살면서 느껴온,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느껴온 그 감정과 생각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 보고 있다 보면 답답함에 숨이 막혀오는 대사와 전개, 이는 이러한 사실감을 극대화하는 장치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내 인생의 결말을 자조 섞인 '구식'으로 만들지 여전히 생기 넘치는 나다운 '신식'으로 만들지는 아직 내 손에 달려 있다. 내리치는 정은 맞아도 아프지만 피한다고 또 다른 아픔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이 영화를 보며 한번 깊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릴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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