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머릿속, 비어버린 마음, 그리고 빈 페이지

끝나길 바라는 영원

by 수인

히이이잉~

사납게 쏟아지는 빗소리 속에서 별안간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와장창. 무엇인가가 처절하게 부서지는 소리. 어떤 상황일까, 무슨 장면일까. 잠시 아득해졌다. 이 소리를 듣고 무언가를 써야 한다. 그럴듯한 새로운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글을 써 내려갔다. 이제는 무슨 이야기인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말을 소재로 한 진부한 이야기. 빈곤한 상상력을 짜내어 쓴 이야기. 그렇게 멀어져 간 작가의 꿈.


열 살 때 문예반 수업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문예반에서는 창의력을 길러주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예컨대 어느 가을날 교정 바닥에 수북이 쌓인 은행잎 더미를 보며 시상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빗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뒤섞인 정체불명의 소리를 들려주며 동화를 써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엄마 뱃속에서부터 각종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는데, 엄마는 내 귓가에 속삭이듯 책을 읽어주셨다는데, 왜 내 안에는 이야기가 없을까. 이제 겨우 십 년 산 아이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물음이었고 해결되지 않은 물음은 두려움으로 남았다.


책을 읽으며 십 대를 보냈고 문학을 전공하며 이십 대를 보냈다. 삼십 대에는 의미 없는 글자와 숫자로 가득한 모니터를 온종일 바라보느라 활자로 된 건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 안에서 이야기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온통 노란빛이었던 교정의 길바닥을 보고도 떠오르지 않았던 이야기가, 뒤섞인 소리에 혼란스러웠던 이야기가, 마음속에서 나만의 형태로 움트기 시작했다.


시작은 타인이었다. 워낙 둥글지 못한 사람으로 태어난 까닭에 자주 세상과 부딪혔다. 어쩌면 스스로 모나다며 자책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내게 늘 그렇게 말했으니까. 너는 특이해. 너는 어쩜 그렇게 혼자 튀는 행동을 하니. 너는 왜 그렇게 생각이 많아?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해서 뭐 할래.


그러게, 그런 생각은 해서 뭐 할까. 아무 의미 없이 혹은 대놓고 의미를 담아 스리슬쩍 흘리는 말과 눈빛에 이리저리 휘둘려가면서 생각에 휩쓸리면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은 뭉쳐서 슬픔이 되었고 하지 못한 이야기는 붉은빛 화염이 되었다. 풀어놓지 못해 그 안에서만 빙빙 맴돌던 나는 어느 날 결심했다. 글을 쓰기로, 지금 내 안에 있는 모든 걸 글로 털어놓아 보기로.


브런치 작가가 되기로 했다. 몇 년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부당 해고를 당하기 전, 나를 친히 부당하게 해고했던 대표는 내게 말했다. "00 씨, 글 잘 써요. 짤막한 이야기라도 써봐요." 그 자신도 브런치 작가였던 그는 내 업무 능력을 비난하는 한편 글을 잘 쓴다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타인이 많아질수록 혼란은 커져만 갔고 결국 그가 이야기한 대로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그렇게 세상의 온갖 부당함과 알 수 없는 부조리와 나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을 글로 적었다.


브런치 작가가 된 이후 브런치 공모전에 두 번 떨어졌다. 그 어떤 출판사로부터도 연락이 없었다. 온라인으로 공개 발행되는 글이니 안전할 거란 생각에 쓴 글의 일부가 표절당했다. 나는 글을 잘 쓰는 건지 아닌 건지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게는 이야기가 생겼고 그 이야기를 풀어놓을 공간이 있다는 것. 지금도 빈 화면을 바라보노라면 잠시 아득해지지만 결국 무언가에 이끌리듯 글을 쓰게 된다는 것. 잊을 만하면 글을 쓰라고 똑똑 나를 두드리는 브런치 덕에 이야기를 쓰게 된다는 것. 여전히 내 재능을 의심한 채, 여전히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그 어떤 일을 겪고도 계속 글을 쓰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던 마음속에서 이야기가 생겼다면 이제 그 이야기가 나로부터 나와 밖으로 퍼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텅 빈 머릿속, 상처받아 비어 버린 마음, 빈 페이지 이 모든 걸 하나씩 채워가며 팽창하길 염원한다. 그렇게 오늘도 브런치를 열었다. 무언가를 끄적였다. 발행 버튼을 누른다. 다시 한번 공모전에 도전한다. 이 모든 과정을 되풀이한다. 끝나길 바라는 영원에 글자를 얹어본다. 마음도 살포시 포개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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