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트예 라비크 슈트루벨의 『푸른 여자』를 읽고
체코, 독일, 핀란드
안트예 라비크 슈트루벨의 『푸른 여자』에는 세 국가가 등장한다.
아디나, 니나, 살라
『푸른 여자』 속 주인공은 세 이름을 가졌다.
세 개나 되는 이름을 가졌으되 자신을 주장할 수 없었던 여인의 이야기,
세 국가를 거쳤으되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는 2000년대 초반 동유럽(체코)과 서유럽(독일)의 여전한 권력관계 불균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는 거대 담론 속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한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녀는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니나, 살라, 아디나. (14쪽)
소설의 주인공인 아디나는 체코 출신으로, 독일의 한 문화계 거물에게 성적 유린을 당한다. 이후 자신을 유린한 유명 인사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세상은 동구권 여성의 말을 들어주는 대신 서구권 유력인사인 남성의 말을 더 믿을 것이라는 생각에 진술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해자의 치부를 폭로하는 것뿐이라는 말에, 아디나는 결국 새로 장만한 칼을 들고 연설을 준비하는 남자의 무대에 접근한다.
춥고 황량한 헬싱키의 한 패널 건물에서 현재와 과거의 기억을 오가는 아디나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 『푸른 여자』는 이렇게 끝난다. 적어도 아디나의 서사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내내 아디나와 함께 했던 ‘푸른 여자’와 아디나의 서사에서는 다르다.
내가 물었다. “왜죠? 왜 그를 죽이지 않았죠?”
푸른 여자가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피부를 위로 당긴다. 그녀의 눈은 가늘어지고 얼굴은 웃는 가면이 된다.
“굳이 내가 왜요?” (484쪽)
『푸른 여자』에는 아디나 외에도 푸른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발트해 연안 항구에 나타나며, 항구 근처에 있는 지하도 반대편으로는 건너가지 않는 여자이다. 푸른색 스카프를 두른 여자는 아디나와 대화를 나누는데, 대체로 그 내용이 모호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여자는 아디나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아디나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푸른 여자를 쳐다봤을 때, 그녀는 결코 이를 간과하지 않는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아무도 나의 외침에 답하지 않았다”라는 아디나의 말에 위로를 건넨다.
지질학자가 되고 싶었던 아디나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홀로 베를린으로 떠날 만큼 독립적인 사람이다. 성폭행을 당한 후 냉장고에 감금되는 상황까지 겪었음에도, 핀란드로 탈출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할 만큼 강인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강인한 사람도 힘없는 동구권 출신 여성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서독’의 ‘남성’, ‘유명 인사’로 대변되는 권력관계 속에서는 아디나의 특별함도, 강인함도 빛을 잃는다. 성폭행을 당한 뒤 ‘중립국’ 스위스 출신의 여성 유력인사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녀는 ‘중립’을 유지하며 아디나의 목소리를 외면한다. 아디나 사건을 계기로 가해자의 인권상 수상을 재고하기 위한 회의가 열리지만, 가해자가 아디나에게 가한 행동은 그저 개인사로 여겨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디나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일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겪은 일이 거짓으로 치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일이었다.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숨겨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한편, 사회 구조 속에 함몰당하는 개인의 모습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결정권을 빼앗은 독일 남성들에게 아디나라는 이름 대신 ‘니나’라고 불리는 것도, 러시아 패티시가 있는 가해자에게 ‘러시아 여자’라고 여겨지는 것도 권력의 불균형 앞에서는 개인의 존엄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디나, 니나, 살라.
핀란드로 건너간 아디나는 ‘살라’로 불린다. 자신이 ‘살라’라고 직접 명명한 건지 헬싱키에서 만난 사람들이 살라라고 부른 건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살라는 아디나 자신처럼 강한 이름이었다.
“아디나, 살리나, 살라.” 그는 돌림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어때?” 그가 도발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라. 강하고 확실하게 들리는 이름이야. 마치 당신처럼.” (42쪽)
강하고 확실하게 들리는 살라라는 이름처럼, 아디나는 강했다. 강했기에 가해자의 유죄를 입증하는 진술을 하지 않았다. 강했기에 가해자를 죽이지 않았다. 강했기에 남을 죽이지 않고 새롭게 사는 생을 택했다. 강했기에 가해자와 같은 위치로 내려가지 않았다. 강했기에 한 단계 더 높은 인간의 삶을 살고자 했다. 베를린에서 만난 사진작가 리키가 이야기한 것처럼 “재산은 많지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능력은 없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권력은 쥐었으되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살라처럼, 아니 아디나처럼 살 수 없는 것이다.
푸른 여자와의 마지막 서사에서 아디나는 헬싱키에 있는 작가의 거리 4번지에 있다. 접이식 도마를 닦고 접시들을 찬장 건조대에 정리하며 전날 푸른 여자와 버섯을 땄던 걸 떠올린다. 그리고 떠난다. 마가목과 바다를 향해서, 패널 건물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바다를 향해서, 다시는 지하도를 건너 이곳에 오지 않을 것처럼. 여전히 헬싱키를 그리워하면서.
아디나, 니나, 살라.
체코, 독일, 핀란드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건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온 세상은 그녀의 것이다. 그녀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있고 어떤 곳에도 있을 수 있다. 새롭게, 그녀답게, 푸른 여자와 대화를 나누며, 그리워하고 또 나아가며.
그녀는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니나, 살라, 아디나.
*본 서평은 파도북스의 요청으로 진행되었으며, 책의 일부를 출판사 허락 하에 인용 및 게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