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키지 않는 공존, 목표는 오로지 생존
나는 예전에 5년 가까이 30여 명이 재직하는 한 중소기업에 다니다 그만뒀는데, 그 회사에 근무하며 여러 유형의 빌런을 만났다. 일일이 열거하면 장편이 되어버릴 테니, 지금 머릿속에 얼른 떠오르는 몇 가지 유형들만 정리하며 이 글로 나누고자 한다.
첫 번째, 짬타이거형. 이른바 회사에서 짬 좀 먹었다는 장기근속자로, 직원들 험담은 물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본인의 사생활까지 여러 사람 앞에서 떠들며 회사를 자신의 놀이터쯤으로 생각하는 유형이다. 항상 "이 X 같은 회사, 퇴사할 거야!"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만둘 용기도 없고 준비도 안되어 있어 늘 말만 그렇게 한다. 또한 이들은 대놓고 사람을 차별하는 야비함과 강자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는 비굴함을 겸비한 매우 찌질한 유형이다. 때로 본인이 필요할 때 다가와 간식을 내밀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뭔가를 부탁하는데, 이럴 때 반드시 냉정하게 돌아서야 한다. 한번 잘해주면 만만하게 생각하여 끝없이 이용하며 내 기를 쪽쪽 빨아가면서도, 정작 내가 필요할 때는 무시해버리는 것이 이들이기 때문이다. 친하게 지내면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솔솔 들려오는 것은 옵션. 물론 나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린 건 다름 아닌, 엊그제 내가 부탁을 들어줬던 짬타이거이니... 아아, 정말 최악의 빌런이다.
두 번째, 악어형. 덩치가 크고 권위적이며 이름 들으면 알만한 큰 기업에 잠깐 다니다 그만두고 꿈을 이루기 위해(?) 중소기업에 왔다는 관리자 유형으로, 사무실에서 본인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부하직원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본인을 과시하는 관종이다. 전 직장에서 쫓겨난 건지 당사자 말처럼 온갖 좋은 자리를 뿌리치고 제 발로 걸어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대기업 출신이라 그런지 업무처리 능력 하나만은 꽤나 뛰어난 편이다. 하지만 그가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은 합법적이지 않으며 누군가의 희생을 수반한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빠르게 얻기 위해 중상모략뿐 아니라 불쌍한 척하며 악어의 눈물을 내비쳐 여론을 만드는 일에도 서슴없다. 악어는 초반에는 대표의 신임을 얻지만, 본인의 욕망이 실현되지 않음에 좌절을 느끼고 비뚤어져 뒤에서 대표를 욕하며 여러 사람을 모아 뭔가를 해보려다 버림받는 유형이다. 악어의 결말이란 왕을 해하려다 들켜 참수형을 당하는 역적과도 흡사하다. 스펙도 좋고 머리도 좋지만 살아오며 인생의 어떤 한 부분에서 뭔가가 뒤틀려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타입으로, 어긋난 본인 인생으로 말미암은 열등감을 부하 직원을 향한 폭언으로 해소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구제불능 폭탄이다. 악어는 집요한 기질이 있어 적으로 만들면 꽤나 피곤해지는데, 만약 불가피하게 적이 되었다면 악어 사냥을 할 각오로 내가 가진 모든 인맥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악어 본인이 절대 눈치챌 수 없도록 치밀하게 궁지에 몰아넣고 포획하여 한번에 제압해야 한다. 여기서 실패하면 악어의 다음 먹잇감은 내가 된다. 악어형은 짬타이거형의 빌런 레벨 따위는 가볍게 초월해버리는, 끔찍한 빌런이다.
세 번째, 원숭이형.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원숭이가 번다는 말이 있다. 원숭이형은 직원들이 하는 일을 멀리 나무 위에서 가만히 지켜보다 때가 되면 쓱 내려와 다 된 밥에 숟가락 하나만 얹어 대표에게 보고한다. 당연히 고생한 다른 직원들 이야기는 쏙 빼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 주도하에 계획하고 실행한 일인 양 보고한다. 하지만 이런 원숭이를 빌런이라 말하기는 애매하다. 왜냐하면 원숭이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퍼포먼스를 잘할지언정,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인이 피해 입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상황 또한 꺼리며 모든 상황에서 수수방관하는 것이 원숭이의 특징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겉보기에 둥글게 느껴진다 하여 절대 원숭이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필요한 상황에서 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다가 본인이 궁지에 몰리는 순간이라면 본인 대신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원숭이기 때문이다. 원숭이형은 짬타이거처럼 피곤하지 않고 악어처럼 위협적이지도 않지만 나에게 어떤 피해를 줄지 예측이 되지 않는, 잠재적 빌런이다.
네 번째, 박쥐형. 박쥐는 퇴근 후 직원들의 술자리에 종종 출몰하여 험담을 즐긴다. 내가 없는 곳에서는 나의 욕을 하며, 내 앞에서는 다른 누군가의 욕을 한다. 대표가 없는 곳에서는 대표 욕을 하며, 대표 앞에서는 직원들 욕을 한다. 박쥐에게는 타인을 위해 지켜야 할 비밀 따위는 없고, 누군가 자신이 한 말로 인해 피해를 입는 것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당사자에게 들킬 경우 또 말을 바꾸거나, 정말 미안하며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상황을 무마하면 그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쥐에게는 애초에 양심이 없고, 그가 말하는 신뢰관계란 모두 거짓이다. 그럼에도 박쥐는 본인의 사내 평판이 좋을 것으로 착각한다. 여기엔 나름의 근거는 있다. 유연한 임기응변으로 어떤 상황이건 구렁이 담 넘듯 잘 넘어가는 것이 박쥐의 특성으로, 박쥐에게는 때로 적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보통 박쥐를 좋아하는 사람은 꽤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박쥐의 경우 평소 잘 알아두고 친분을 쌓아뒀다가 내가 필요할 때 인간적으로 호소하면 나를 직접적으로 돕지는 않더라도 나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도록 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유형으로, 다른 유형에 비해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사회적 빌런이다.
어쩌면 그곳에서 누군가에겐 내가 빌런이었을지 모르겠다. 타노스의 입장에선 아이언맨이 빌런이듯, 모든 입장이란 상대적인 것이니 말이다. 사람을 파악하고 그의 유형에 걸맞게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예민하고 사람을 가리는 편인 나에게는 회사 내에서 불합리와 잡음을 조율하며 버티는 일이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며 잘 넘겨도 속 마음은 사람들 때문에 너무 지쳐서 너덜너덜해질 때가 많았다. 심지어 아침에 일어났는데 출근해서 사람들 보기가 너무 싫어서 운 적도 있다. 하하... 아무튼 바람대로 나는 그 회사를 그만두었고, 이후 다녔던 회사도 6개월 정도를 다니다 나와 지금은 독립 워커로 일을 하고 있다. 8개월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여전히 내 독립 워커 생활은 시차 적응 중인 이방인처럼 낯설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이렇게 지난날을 회상해보니 그때 만났던 그 사람들은 정말이지 참... 최악이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당시엔 견딜 수 없었던 그 상황이 이제 그저 과거가 되었으며,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안도할 뿐이다. 그러는 한편으로 나는 기도한다. 앞으로는 제발 모두와 얇고 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들이 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나 또한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음으로, 그리하여 평온하고 무탈한 일상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라고.
Tip. 돌아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그보다 모든 사람은 돌아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들 어딘가 이상한 부분을 하나씩은 갖고 있습니다. 기후재난과 바이러스 위기로 멸망을 향해가는 와중에 AI와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생존경쟁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2022년 대한민국에서 이상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는지요. 그래서 저는 저에게 피해만 되지 않는다면 타인의 이상한 부분을 개성으로 이해하는 편입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여러분, 만약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며 이해하고 넘어가려 하는데도 상대의 잘못으로 인해 도저히 피해 갈 수 없는 마찰이 있다면, 이기세요. 무척 피곤한 일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기세요. 편히 이기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된다면 회사를 그만둘 각오를 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최후의 보루 한방을 던져서라도 꼭 상대를 제압하고 이기세요. 그러면 여론이 바뀌고 나를 둘러싼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회사를 나오더라도 속이 편안하여 오래도록 후회가 남지 않습니다. 뭐, 제 경우에는 그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