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겨울, 내가 있던 자리

오디션과 첫 공연과 겨울밤과 클럽A와 사장님

by Kyum

처음 기타를 사던 날은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기타는 교내에서 기타 좀 친다는 선배가 골라줬다. 막상 내가 픽업 장치가 내장된 45만 원짜리 기타를 덥석 사겠다고 하자, 선배는 자기가 직접 기타를 골라주고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냥 좋은 기타라고만 했지 누가 너더러 이걸 사라고 했냐. 아까 15만 원 짜리도 괜찮았는데 굳이 이걸 사야겠냐며 나를 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 저 공연도 하고 앨범도 내고 방송에도 나갈 거예요. 공연하고 방송 나갈 때 쓸 기타인데, 픽업 장치 없으면 곤란하잖아요.


그날 난 주말에 입시학원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고 번 두 달치 급여를 몽땅 털어 기타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새벽까지 인터넷 강의를 보며 손목 인대가 다 나가고 손가락에 굳은살이 딱딱하게 박이도록 기타의 기본 코드를 익혔다. C코드와 A코드를 가장 처음으로 익혔고, 조금만 힘을 느슨하게 줘도 버징이 생기는 F코드를 가장 늦게 익혔다. 처음엔 매번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5분만 연주해도 지쳐버렸다. 하지만 점차 요령이 생겨 연습한 지 석 달이 지났을 무렵엔 어느 정도 막힘없는 연주가 가능했다. 코드를 다 익힌 후에는 스트로크, 아르페지오, 왈츠 등 리듬 패턴을 부드럽게 연주하기 위해 연습했고, 그러면서 흥얼댄 멜로디에 가사를 입혀 곡을 만들었다. 그 결과 그 해 겨울엔 스스로 생각해도 제법 그럴싸한 자작곡 몇 개를 완성해냈다. 곡을 다 만든 후 나는 인터넷으로 검색해 알아낸 공연장에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던 걸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낮에 두 번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고, 오후 네 시가 좀 넘어 다시 전화를 하니 그제서야 어떤 남자가 자다 깬 목소리로 받았다.


- 안녕하세요. 저 여기서 오디션 보고 싶은데, 언제 가면 돼요?


대학가 인근에 있는 소규모 공연장 클럽A는 인디씬에서 소위 좀 알아준다는 음악 고수들의 정기공연이 열리는 곳이었고, 갓 음악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소위 인디씬 입성을 위한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곳이기도 했다. 인터넷에 인디 음악팬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에는 클럽A에 관한 전설이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그곳에서 공연을 하며 어렵게 음악활동을 이어간 음악인은 3년 안에는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는. 왜 하필 3년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3년을 버티기가 힘들어서였을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 그 기간을 버티고 헬로루키에 입선한다던가 음악방송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진 음악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냥 터무니없는 소문 같진 않았다. 대부분은 본인도 언젠가 그렇게(아마도 3년 안에는) 음악인으로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클럽 A를 찾았을 테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때의 내게는 무엇보다도 소속집단이라 말할 만한 것이 필요했다. 앨범을 발매해 본 적도, 음악교육을 정식으로 받아본 적도 없는 내가 어디 가서 저 음악 해요.라고 말하기 위해 적을 둘 수 있는 어떤 집단이나 명분 같은 것이 있었으면 했다. 클럽A에서 하는 정기공연은 그것을 충족시킬만한 좋은 조건같았고.


오디션을 보러 가려고 지하철역에서 내려 15분을 걸었다. 가는 길이 오르막인 데다 전날 눈이 와 땅이 어는 바람에 미끄러웠다. 난 행여 넘어질까 겁을 내며 조심조심 언덕을 올랐다. 기타를 멘 어깨는 뻐근하게 아파왔고, 얇은 여름용 컨버스를 신은 발은 진작에 꽁꽁 얼어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 안쪽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종아리까지 찌릿찌릿해서 동상에 걸릴때의 감각이란 이런거구나. 싶기도 했다. 추위를 참고 간신히 언덕을 넘어가니 횡단보도 맞은편에 클럽A의 나무 입간판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입간판 위에 클럽A라고 인쇄한 종이를 덧붙여둔 게 보였다. 나는 종이 하단에 까만 매직으로 그려진 기울어진 화살표를 따라 좁고 가파르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통로 천장의 형광등은 갈아 끼울 때가 되었는지 사이키 조명처럼 깜빡거려 어지러웠고, 통로 양쪽 벽면엔 그동안 클럽A를 거쳐간 음악인들의 공연 홍보 포스터 수십 개가 붙어 있었다. 개중에는 붙인 지 한참이 지난 듯, 원래의 색을 못 알아볼 만큼 누렇게 바랜 포스터도 간간히 보였다. 내려가면서 포스터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봤다. 간혹 내가 아는 유명한 음악인들의 이름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이름들이었다.


문을 열자 지하실 냄새와 비릿한 석유냄새가 뒤섞인 퀴퀴한 공기가 코로 훅 들어왔다. 객석에는 홀 가운데 놓인 석유난로를 중심으로 열몇 개쯤 되는 철제 접이식 의자가 듬성듬성 놓여있었다. 객석 맨 뒤에는 작은 콘솔 하나가 있었는데, 그 콘솔 앞에 한 남자가 보라색 스웨터를 입고 서있었다. 얼마 전 나와 통화한 클럽A의 사장님이었다. 실내가 어둡고 시력이 나빠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라 공간을 두리번거리며 서있던 날 보고 사장님이 말했다.


- 전화 주신 분 맞죠? 준비되면 노래 바로 시작하세요.


나는 언 손을 호호 불어 녹인 후,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 튜닝했다. 그러고는 곧 무대에 올라 잭을 연결하고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들자 작은 조명이 내뿜는 빛이 안구를 정면으로 강타해 잠시 눈앞이 새까매졌다. 몇 번 눈을 깜빡이며 시력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잠시 후 좀 괜찮아지자 기타를 무릎에 얹고 카포를 끼웠다. 그리고는 곧 텅 빈 객석 어딘가를 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언젠가 집에 놀러 온 친구 앞에서 부른 적은 있지만, 영 모르는 사람에게 들려주기는 그날이 처음인, 내 자작곡이었다. 무대 옆 출입구에서 들어오는 외풍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한 탓인지 나는 노래하는 내내 떨었다. 노래를 마친 후 어쿠스틱 기타의 긴 선율이 완전히 멎었을 때, 클럽 A의 사장님이 성큼성큼 걸어와 무대 위에 배터리식 전기난로 하나를 놓아주며 물었다.


- 춥죠?

- 괜찮아요.

- 노래부를 때 마이크에 좀 더 입을 가까이 대봐요. 음... 한곡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전기난로 때문에 몸이 조금 녹았고, 첫 곡을 마치니 긴장도 조금 풀려 두 번째 곡은 첫 곡보다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노래를 끝내자 어둠 속에서 사장님의 느린 박수소리가 들렸고, 난 마이크에 대고 감사합니다. 라 말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기타 케이스에 기타를 넣고, 입고 있던 패딩의 지퍼를 목까지 올린 후 그제야 나는 사장님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나만한 키에 몸은 말랐고, 머리카락 숱이 많아서 대머리 걱정은 평생 하지 않을 것 같은 중년 남자였다. 마른 몸에 비해 살짝 통통한 볼과 크고 맑은 눈 때문에 귀여운 이미지였고, 내가 본 어른 중에서 인상이 가장 순했다. 뭐랄까, 숲 속에 살면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몰래 도와주는 착한 크롤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있다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얼굴.


- 수고했어요. 직접 만든 노래랬죠?

- 네.

- 노래 좋네. 본인 색깔도 확실하고요.

- 감사합니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사장님께 꾸벅 인사하고 다시 비좁은 통로를 조심조심 올라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집에 오니 밤 열 시가 좀 넘어 있었고, 종일 추위에 떨었던 탓인지 피곤해서 씻고 일찍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낮에 있었던 민망한 경험은 왜 꼭 밤만되면 부끄러운 감정만 몇 배로 증폭되어 되살아나는건지. 나는 이불을 발로 뻥뻥 차며 좌우로 굴렀다. 사실 그날 내 오디션은 엉망이었다. 코드도 많이 틀렸고, 특히 F코드를 잡을 때는 매번 버징이 생겨 노래를 부르다 말고 흘끔흘끔 기타를 쳐다봤다. 기타를 신경 쓰다 보니 노래가 흐트러져 음정은 나가고 가사는 틀리고... 사장님이 내게, 본인 색깔이 확실하다고 한 건 어쩌면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 난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클럽A 사장님은 누군가의 진심을 함부로 비웃을 사람 같지 않아서였다. 다만 그저 엉터리로 오디션을 본 게 너무 창피해서,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다시 뻥뻥 걷어차기를 반복하다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늦은 오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클럽A의 사장님이었다.


- 공연요? 저요? 제가요?

- 네.

- 그럼 저 오디션 통과한 거예요?

- 통과하고 말고 할 게 어딨어요. 허허.

- 제가 공연을 해요?

- 그렇다니까. 포크 싱어송라이터 기획공연 짰는데. 다음 주 일요일. 하실 거죠?


전화를 끊고 나는 전날처럼 침대 위에서 좌우로 굴렀다. 이번에는 창피해서가 아니라 기뻐서. 야호. 거봐. 부딪혀 보기를 잘했잖아. 공연 준비하면서 연습하다 보면 기타 실력도 빨리 늘겠지? 공연 꾸준히 하고, 기타 연습 열심히 하고, 자작곡도 계속 만들자. 노래도 더 열심히 해야지. 그리고 공연하다 만난 음악인들이랑 친해져서 콜라보도 하고, 큰 레이블에서 연락 오면 전속계약도 하고,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같은 큰 무대에서도 공연하고, 그러다 음악방송에도 나가고 라디오 DJ가 되고 어쩌면 광고 같은 것도...


부푼 꿈을 안고 그날부터 나는 첫 공연을 위한 특급 훈련에 들어갔다. 주어진 공연 시간은 30분, 그 시간을 꽉 채워서 노래하려면 내겐 최소 여섯 곡의 셋 리스트가 필요했다. 세 곡은 자작곡으로 채우고, 나머지 세 곡은 사람들이 다들 알만한 유명한 가요를 준비했다. 연습할 때 여기는 공연장이고, 내 앞에는 마이크가 있고, 이쯤에는 관객들이 있고, 저쪽 콘솔 앞에는 사장님이 있고... 그런 실제 상황을 상상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잘 하고 싶었다. 떨지도 않고, 음정 하나도 안 틀리고 싶었다.


열흘이 지나 마침내 그날이 왔다. 인디 음악인으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나의 데뷔 무대, 클럽A에서 하는, 나의 첫 공연. 객석에는 삼십여 명의 관객들이 앉아있었다. 난 그날 첫 순서여서 공연 시작 5분 전부터 기타를 들고 불 꺼진 무대 위 의자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무대 조명이 켜지고 사장님이 나에게 공연을 시작하라는 핸드사인을 보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동안 집에서 연습한 게 전혀 생각나지 않았고, 삼십 명 관객들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실내가 추웠는데도 식은땀 때문에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시작을 못하고 삐질대는 내 모습에 관객들은 수군거렸고,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머뭇대다가 클럽A의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이 입모양으로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걸 보자, 난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윽고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난 관객들에게 내 이름도 말하지 않고 무작정 노래를 시작해버렸다


첫 곡을 실수 없이 마치자 긴장이 풀렸다. 두 번째 곡부터는 준비한 레퍼토리대로 진행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중간에 한두 번 실수하기는 했어도 크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열흘 동안 준비한 3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 수고했어요. 첫 공연인데도 안 떨고 잘하네.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며 내게 하얀 봉투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4만 5천 원이 들어 있었다. 입장료에서 공연장의 지분을 제외하고 출연진들의 머릿수대로 나눠 지급된 내 몫의 공연료였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기대도 하지 않았던 수익이 생기니 기뻤다. 첫 공연을 하고 번 돈이라는 것도 나름 큰 의미라서, 난 한동안 그 돈을 지갑에 넣어두고 쓰지 않았다.


그 뒤로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주에 한 번은 클럽A에서 공연을 했다. 공연 레퍼토리를 전부 자작곡으로 채우고 싶어서 매일 새벽까지 새로운 곡을 만들다 보니 자작곡 수가 점점 늘었다. 그중에는 솔직히 좀 말도 안 되는 노래들도 있었는데, 관객들은 그런 내 노래를 들으면서도 (어쩌면 마지못해) 박수를 쳐주고 내 시답잖은 멘트에도 잘 웃어줬다. 이후의 공연에는 첫 공연 때만큼 많은 관객이 오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첫 공연은 그날 출연진 중 한 분의 친구 스무 명이 단체 관람을 와서 유독 관객이 많았던 거였다. 보통은 세 명에서 열 명 정도가 공연장을 찾았고, 그중 두세 명은 클럽A 사장님의 지인들이었다.


어느덧 공연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다. 내 기타와 노래 실력은 그 사이 조금은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느끼기에 여전히 내 실력은 형편없었다. 타브 악보를 보며 새벽까지 기타를 연습하거나 유튜브에서 리듬 패턴을 검색해 강의를 듣고 연습을 해봐도, 연습한 것을 내 음악으로 표현하고 응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래도 연습량을 확 늘리건 새로운 뭔가를 배워 부족한 부분을 채우건, 음악을 계속하려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한편, 그때 우리 과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실은 나는 음악과는 무관한 걸 전공하다 문득, 어린 시절 가수의 꿈을 이루겠다고 마음먹게 된 거였으니. 난 오랜만에 같은 과 동기들과 점심을 먹으며 내가 만든 자작곡이 어떤 내용인지, 클럽에서의 공연이 어땠는지 등에 관한 이야기를 눈치 없이 늘어놨다. 토익공부와 자격증 시험에 매달려 있던 과 동기들 중 한 명이, 걱정과 부러움이 반반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 너 그럼 졸업하고 뭐할 거야?

- 음악.


순간 그 애들의 표정에 일종의 경멸이 스침을 확인한 후로 나는 과 동기들과 멀어졌다. 그들도 나도 서로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엔 교류가 뚝 끊겨 마주쳐도 눈인사만 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쩔 때는 눈인사도 안 하고 서로 모른 척 지나가기도 했고.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나는 휴학계를 내고 입시학원 주말 아르바이트를 평일 풀타임으로 전환했다. 낮에는 학원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음악학원에서 기타와 화성학을 배웠고, 레슨이 없는 날엔 배운 내용을 복습했다. 주말 중 보통 일요일에는 클럽A에서 공연하고 토요일엔 공연을 준비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클럽A에서 만난 음악인들의 소개로 야외 행사 공연에도 몇 번 초대되어 페이를 받고 행사를 다녔다. 주로 지역축제나 박람회 같은 거였다. 한번 무대에 오르면 30만 원에서 많게는 50만 원 정도를 받았는데, 돈의 액수보다는 음악을 하며 번 돈이라는 데서 나는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다. 번 돈 중 일부는 낙원상가에 가서 셰이커나 탬버린 등의 소형 악기를 사거나, 평소 갖고 싶었던 악보집을 구매하는 데 썼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행사가 계속 들어왔고 제법 큰 행사 무대에도 자주 서게 되면서 나는 한 달에 오백만 원에서 천만 원을 매달 고정적으로 벌어들이게 되었다. 번 돈으로 세션을 섭외하고 스튜디오를 예약해 곡을 녹음하고 앨범을 발매하는 과정도 매끄러웠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앨범이 유명해져서 음원차트를 휩쓸고 방송 출연도 자주 하다가 영광스럽게도 골든디스크 어워즈를 수상하며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라는 결말도 가능했을까.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아도 아주 희박했겠지. 가끔 나는 그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더라면 지금의 내 삶은 어떻게 달랐을지를 생각해본다.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과거의 내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결과가 더 좋았을지는 영영 알 수 없겠지만.


휴학 후 석달이 지났을 무렵, 나는 입시학원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주말에만 일할 때는 그나마 이틀이라 버틸만했는데, 평일로 전환하니 못 볼 꼴을 많이 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잘 알려진 스타강사들 중 일부는 자기 책상에 커피를 쏟았다며 굳이 나를 불러 이거 좀 닦아달라며 사무실을 나가버리기도 했고, 때로 본인의 스타킹이나 옷핀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내게 시키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강사들 때문에 자존심이 구겨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학생들이 더했다. 정해진 자습 공간을 두고 빈 강의실에 들어가 몰래 수다를 떨거나 과자를 먹는 학생들에게 자습실로 가라고 말하면 내 얼굴이 뚫어져라 노려보며 대놓고 욕을 하거나 내 말투를 흉내 내며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거나 내 어깨를 툭 치고 나가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 일들이 아주 많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기에, 나는 언제든지 누군가에게 무시당할 수 있음을 감안하고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레슨을 받던 음악학원이 지방으로 이전을 하면서, 나를 가르치던 학원 원장님이 그쪽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얼떨결에 나도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난 그러면서 입시학원 아르바이트도 그만뒀고, 그 후 한 달간 혼자 내 방에 틀어박혀 기타를 연습하고 자작곡을 썼다. 네 달 동안 배운 건 많았다. 하지만 응용력과 표현력에 있어서는 레슨 전과 비교했을 때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배우고 익혔던 걸 음악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훈련과 더 많은 연습이 필요했을테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해서 연습할 땐 밑빠진 독에 쌀을 붓는 것 같았다. 자작곡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비슷한 패턴에 뻔한 가사만 답습하는 듯한 자작곡은 내가 써놓고도 지겨워 부르기 싫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생활비 걱정도 해야 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한 달에 두 세 차례 행사를 뛰면서 그나마 돈을 좀 벌었는데, 10월이 되자 미세먼지 때문에 예정되어 있었던 야외 공연도 전부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세 시간을 대기해서 참가한 공중파 오디션 프로그램은 1차 예선에서 탈락했다.


함께 공연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더는 공연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것도 그 무렵이었다. 듣기로는 누구는 유학을 갔다더라, 누구는 카페를 차렸더라는 등 소문이 무성했지만 실제로 내가 직접 확인한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난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매번 초조함을 느꼈다. 사실 다들 집이 아주 부자라던가, 평생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다던가, 아니면 어쩌면... 취직해서 돈 벌겠다고 이곳을 떠난 건 아닐까. 나만 이렇게 대책 없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음악을 시작한 이례 처음으로, 난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서 느끼는 기쁨이 아닌 음악 외의 것들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상황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츄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매일같이 도서관에 가서 토익을 공부하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던 과 동기들 중 몇몇은 대기업에 합격했다. 그 애들이 입사를 앞두고 해외여행 중이라며 올린 인스타그램 속 사진엔 축하한다는 내용의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동기들도 더러 있었다. 시험에 합격하고 취직에 성공한 동기들이 모여 함께 찍은 술자리 단체사진 속 얼굴들은 저마다의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를 품고 환하게 들떠있었다. 그들을 보자 거울 속 내 모습과 내 현실이 더욱 볼품없어 보였다. 월수입이 100만 원만 돼도 음악만 한다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계속 그런 식으로 음악만 하다가는 한 달에 100만 원은커녕 50만 원도 못 벌 것 같았다. 당장은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을 통장에 모아둔 게 있어 버틸만했지만, 그 돈이 다 떨어지면 다시 아르바이트라도 구해야 했다. 휴학을 한 후 다섯 달이나 지났지만, 내겐 음악적인 성과나 성취랄 게 아무것도 없었고 기타실력도 노래실력도 휴학 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앨범을 발매할 돈도, 전공자들 같은 출중한 악기 연주 능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약 없는 야외공연을 찾아 초조한 마음으로 웹사이트를 뒤적거리는 것뿐이었다.


클럽A에는 또 한 번의 겨울이 왔다. 그날 서울 하늘에선 오후 내내 굵은 겨울비가 내렸다. 비 때문인지 평소에는 사람이 많던 클럽A 인근의 대학가 일대에는 그날따라 유독 아무도 없었다. 휭휭대는 바람소리 때문에 텅 빈 거리는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날의 공연이 내가 클럽A에서 하는 마지막 공연이 되리라는 걸.


공연 시작 시간은 밤 8시부터였다. 첫 번째 순서였던 나는 평소처럼 공연이 시작되기 5분 전부터 무대 위로 올라가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8시가 지나도 관객이 오지 않았다. 공연은 미뤄졌고, 사장님은 10분만 기다리라며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곧 낯익은 얼굴이 클럽 A의 문을 열고 들어와 객석 맨 끝에 털썩 앉았다. 전에 공연 뒤풀이 자리에서 전에 몇 번 본 적 있는, 사장님 앞집에 산다는 남자였다. 이윽고 나는 노래를 시작했다. 출연진들은 내 노래가 끝날 때마다 매번 관객인 양, 또는 내 팬이라도 되는 양 열심히 박수를 쳐줬다. 나 또한 공연을 끝내고 내려와 다른 출연진들이 공연할 때 힘차게 박수를 쳐줬다. 하지만 어쩐지 힘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힘차게 박수를 칠수록 오히려 영혼이 몸 밖으로 자꾸 빠져나가는 느낌이랄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각자 자기 차례에서 평소보다 레퍼토리를 좀 줄여, 그날 우리 공연은 평소보다 30분쯤 일찍 끝났다.


밥이라도 먹고 가자는 사장님의 말에 우리는 공연장 근처 고깃집에 갔다. 그날 공연한 사람은 나까지 총 셋이었고, 셋 다 혼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포크가수였다. 난 고깃집에 앉아 불판 위에 올려진 삼겹살을 하나씩 집어먹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테이블 위에 늘어나는 빈 소주병 개수를 헤아리며 그날 내가 얼마를 내야 할지를 계산했다. 학원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데다 한동안 번 돈도 없었다. 게다가 난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아 남들이 술을 많이 마신 자리에서 술값을 같이 내는 게 손해 같았다. 그날은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테이블에 빈 소주병이 다섯 개나 생긴 걸 보며, 술값이 아까우니 고기라도 많이 먹자는 심정으로 열심히 삼겹살을 집어먹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이 그렇게 치사해진다. 그 무렵의 나는 좀 치사했다.


- 은눈씨는 음악 왜 해요?


열심히 고기를 먹고 있던 내게 B 씨가 물었다. B 씨는 클럽 A에서 정기 공연을 한 지 3년이 넘었고, 정규 앨범을 두어 장 발매한 30대 후반의 남자 가수였다.


- 좋아서요.

- 음악 계속할 거예요?

- 네. 왜요?


날카롭게 되묻자 B 씨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며 아니에요. 하고 자기 앞에 있던 소주잔을 들어 절반쯤 남아있던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와 추측하건대, 그분은 그날 내게 악의 없이 본인이 고민하던 부분을 물어봤던 것이리라. 난 왜 음악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을지 어쩔지 본인도 막막했던 거였을테지. B 씨를 잠시 노려보던 나는 순간 이래저래 갑갑한 마음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몇 잔이나 목구멍으로 꼴꼴 흘려보냈다.


- 은눈씨 좀 천천히 마셔요. 허허. 오늘 관객이 좀 왔으면 좋았을 건데. 아쉽네. 근데, 이런 날도 있는 거죠 뭐.

- 평소에도 와봤자 다섯 명인데요. 몇십 명 와봤자 공연 끝나고 버는 돈은 오만원도 안되고. 그러니까 관객 있으나 없으나 그게 그거 아닌가.

말을 한 건 나였다. 속상한 마음에 술기운이 더해져 함부로 뱉은 말이었다. 내 말로 인해 그곳에 앉아있던 사람들이나, 혹은 나 자신이 받을 상처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았던 우리 테이블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한동안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불판 위에 남아 새끼맣게 타서 쪼그라든 삼겹살 한 점만 노려보고 있었다.


- 은눈씨 취했네. 허허.

- 솔직히... 답 없잖아요. 저도 앞으로 어떡해야 좋을지...

- 자, 다 마셨으면 이제 슬슬 일어날까요.


사장님은 내 말을 막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고깃값을 계산했다. 옆에서 B 씨가 같이 내자고 했지만, 오늘은 내가 내겠다며 사장님이 만류했다. 다들 먼저 나가고, 기타를 메고 자리에서 제일 늦게 일어서는 나에게 다가온 사장님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냐고요. 아니요. 답 없다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답 없어요. 음악 전공자들은 레슨이라도 해서 생계비 버는데, 전 그럴 능력도 없거든요.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요.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사장님. 저는...


- 저 괜찮아요. 그리고 죄송해요.

- 아이고. 뭘요. 아닙니다. 허허.


죄송하다는 말은 공연을 망쳐서 미안하다는 의미였다. 관객이 있건 없건 공연을 망친 건 내게 무대를 제공해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날 내 공연은 음악을 시작한 이례 최악이었다. 텅 빈 객석을 보다 순간 내가 무대에 있다는 걸 잊어버려 긴장이 확 풀리며 머릿속이 새하얘진 게 화근이었다. 가사 실수도 많이 하고, 기타 연주도 몇 번이나 틀렸다. 1년 전 클럽A 에서 오디션을 보던 날도 그렇게 엉망이었지만, 오디션 날은 최선을 다했고 그날은 관객도 없는데 대충 시간이나 때우고 집에 가려했다는 게 달랐다. B 씨가 내게 음악을 계속할 거냐 물었을 때 비뚤어졌던 결정적인 이유도 실은 내가 그날의 공연을 망쳐서였다. 난 B 씨의 그 질문을, 너처럼 음악도 못하는 사람이 정말 계속 음악을 할 거냐고 받아들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공연을 망친 건 관객이 없어서가 아니었음을. 텅 빈 객석이 꼭 보이지 않는 내 미래같아서, 막막한 두려움에 노래를 하다 그만 얼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걸. 그때쯤 나는 음악에 대한 자신감과 의욕을 완전히 잃었고, 이대로 가다간 내 정신이 이상해지겠구나 싶기까지 했다. 가진 게 없어도 음악만 하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서는 아무래도 행복해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최선을 다해 도망치기로 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있는 힘껏, 내가 가장 사랑하던 것으로부터.


택시를 타고 가라는 사장님께 한번 더 괜찮다 말하고, 덜덜 떨며 역까지 걸어갔다. 통장에 얼마 남아있지 않은 돈을 택시비로 낭비할 수가 없어서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 곳을 떠나는 건 내 음악을 미워할 수가 없어서야. 한때 모든 걸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했던 음악을, 평생 미워하면서도 놓지 못해 억지로 붙들고 살아가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이야. 돈을 벌지 못한다면 나는 분명 내 음악을 죽도록 미워했을 거야. 그러니깐, 이게 맞는거야. 소중한 건 그저 소중하게만 간직하자. 그리고 앞으로 취미로 계속 음악을 하면 되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 어떤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만날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그런 다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본심은 이랬다. 이제 나는 두 번 다시는 음악인이 될 수 없을 거라고. 모든 게 다 끝난거라고.


클럽A의 사장님은 한동안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다가, 두어달 쯤 지나 복학신청을 마치고 취업을 준비하던 중에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는다면 사장님은 분명 내게 공연을 하자고 말할 텐데 사장님의 공연 제안을 거절할 용기도 없었고, 혹시라도 왜 공연을 안 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만약 이유를 물어보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서운할 것 같았다. 클럽A 에서 만난 음악 하는 사람들을 볼 면목도 어쩐지 없어져서 난 그들의 연락처를 전부 지웠다. 그곳에서 공연을 했던 사람들 중 나처럼 중도하차하는 사람들은 흔했다. 물론 취직을 하거나 사업을 시작한 후에도 가끔 공연을 하거나 관객으로 방문하며 클럽A 와의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곳과 그 날들과 같이 공연하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아팠으니까. 그 무렵 나는 클럽A와 내 꿈을 인생에서 최대한 지우려고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남들은 짧아도 몇 년, 길면 평생에 걸쳐 할만한 그 고민을 나는 졸업 전인 6개월 안에 끝내야 했다. 복학 전 방학에는 토익 시험을 준비했고, 복학 후에는 학과 시험공부를 하며 형편없던 학점을 조금이나마 만회했다. 음악을 하며 간혹 공연기획을 하는 지인들과 함께 공연 타이틀의 아이디어를 내거나 공연 소개문을 써본 경험이 있어, 나는 진로를 공연기획 분야로 정했다. 학교에 다닐 때 철학, 예술, 문학과 관련한 교양수업을 많이 들어서 내 적성과도 잘 맞을 것 같았다. 예상은 나름 적중했다. 나는 운 좋게 한 대형 예술단체의 공연기획팀 인턴으로 지원해 합격했고, 그 길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는 보도기사도 쓰고, SNS도 관리하고, 행정잡무도 처리했다. 가끔 예술팀이 공연할 때 공연장 스태프로 지원을 나가 관객들을 안내하고, 리허설부터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대 가까이서 공연을 지켜보기도 했다. 다른 인턴들은 공연 지원 나가는 걸 좋아했는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난 사실 그 일을 정말 싫어했다. 공연을 보고 있으면 내가 포기한 것들이 자꾸 생각나서였다. 얼마 전까지는 무대 위에 있었는데, 이젠 무대 아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꿈에 대한 미련과 그럼에도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이 뒤섞여 잠못드는 날들이었다.


공연장은 화려했다. 무대는 클럽A 보다 열 배가 넓고 객석은 스무 배쯤 넓었으며, 스피커 두대가 조악하게 놓여있던 클럽A 와는 다르게 서라운드 스피커가 공연장을 근사하게 에워싼 웅장한 음향장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은 평생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해온, 자기 분야에서 단련된 프로였다. 무대 아래서 그들을 올려다볼 때면 나는 일어난 적 없는 내 과거와 미래에 관한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가늠했다. 만약 내가 그때 더 열심히 음악을 했더라면 나중엔 이런 무대에서 콘서트를 열게 되었을까. 그랬더라면 그건 언제쯤이었을까. 중학교 때 어떻게든 가수가 될 거라고 우겨서 일찍 음악을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자우림 같은 음악인이 되어 있었을까. 아님 대학을 중퇴하고 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했더라면... 과 같은. 그러면서 한동안 나는 가수들의 콘서트는 물론 유튜브로 공연 영상을 보거나 거리에서 노래하는 버스커들을 마주치는 일조차도 피해 다녔다. 잃어버린 걸 생각나게 하는 모든 외부의 자극제를 철저히 차단하고 싶었다. 그러고는 주말이면 어떤 노래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강남역이나 명동의 번화가를 굳이 찾아가 아무 음악도 재생하지 않고 이어폰을 꽂은채로 혼자 몇 시간이고 그 일대를 유령처럼 배회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바빠 보였고, 난 내가 그들 중 한 명이라는 게 좋았다. 그러니까, 그날들의 배회란 내게 어떤 의식 같은 거였다. 여전히 꿈에 대한 미련을 붙잡고 울먹이던 내 안의 나를 놓아주기 위한. 그 후 3년 쯤 지나고 나서야 난 음악을 취미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요즘도 가끔은 공연을 하거나, 기타를 치며 자작곡을 만든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원한다면 콘서트도 얼마든지 간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다 내려놓고 순수하게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 내겐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몇 년 전에 클럽A가 재정난으로 폐장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나를 음악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받아주었던 그 공간의 물리성이, 공연 한번 하는 것 만으로 세상 부러울 게 없던 그때의 나와 함께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이다. 공간이 사라진 건 너무 슬픈 일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는 그때의 내가 결코 그립지는 않다. 조금도 그립지 않을뿐더러, 감싸주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그때 난 막연하게 하고 싶은 일에만 매달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오기를 부리던 대책 없고 철없는 청춘이었다. 내 삶에 대책이 없는 만큼, 오만한 말과 행동들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스스럼없이 쉽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았다. 다만 그럼에도 그때의 모자란 나를 받아준 클럽A의 사장님만은 가끔 그립다. 두 번의 부재중 전화를 끝으로 사장님은 더 이상 내게 연락하지 않았고, 나 또한 사장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날 고깃집에서, 사장님은 아마도 눈치채었을것이다. 내가 곧 한때 나의 전부였던 모든 것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도망치리라는 걸. 그래서 나는 사장님에게 연락을 할 수가 없다. 미안함과 창피함과 고마움이 뒤섞여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 지 알수가 없어서, 이제 와 대뜸 전화해서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하고 안부를 물어본다는 건 정말이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앞으로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연락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냥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낙원상가에서 구매한 첫 기타, 픽업 장치가 내장된 45만 원짜리 어쿠스틱 기타를 나는 지금도 갖고 있다. 10년 전처럼 하루에 몇 시간씩 연주를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줄을 갈며 관리하지는 않지만, 이따금씩 먼지를 닦아내고 두어 곡 연주하다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오다가 이내 환하게 밝아지곤 한다. 난 앞으로도 그 기타를 누군가에게 주거나 팔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갖고 있을 생각이다. 만약 450만 원짜리 마틴 기타를 누가 공짜로 줘서 손에 넣게 된다고 할 지라도, 그냥 그렇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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