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치 Feb 27. 2024

여기는 어디?

오늘의 숙취 (6)

술을 마시다 보면 점점 초조해진다. 그건 서울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막차시간.


막차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면 때로는 열차 내부가 술 냄새가 나는 느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는 사람들이 많다던가,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다던가

혹은 사람들끼리 조금 업된 느낌으로 시끄럽다던가.


아무튼 술을 좋아하는 나로선 집으로 돌아갈 때 이런 풍경은 꽤 흔한 편이다.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긴장하는 경우도 있다.


무슨 날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영등포 타임스퀘어 인근에서 술을 마셨던 모양이다. 무슨 이유인지 장을 봤다. 나는 파인애플을 좋아한다. 그래서 장바구니에 파인애플도 보인다. 저 사진을 페이스북에도 올렸던 거 같다. 술을 마시고 장을 본다니 대단한데? 내가 한 생각이었던가, 누군가가 댓글을 달아줬던가. 아무튼.


늦은 시간 광역버스는 달린다. 영등포에서 출발해서 한강을 따라서 일산으로 달린다. 늦은 시간에는 사람도 몇 타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았다.


일어났다. 주변이 까맣다. 시간이 늦었으니 어둡겠지. 여기는 어디쯤인가. 잠이 덜 깬 눈으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데 아무래도 익숙한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광역버스 바깥 풍경이 원래 익숙하지 않긴 하다. 그래도 이건 뭔가 싸하다.


지도앱을 켜서 실시간 위치를 살펴본다. 지도에는 내가 모르는 어딘가이다. 땀구멍이 열리면서 술이 확 깬다. 일단 빠르게 버스 벨을 누르고 내렸다.


버스정류장에는

막차에서 내린 나와 손에는 장바구니를 든 나.


돌아가는 버스는 이미 끊긴 지 오래다. 장바구니가 더 무겁다. 아내 메시지가 온다. 어디냐고. 지금 가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낸다. 의심이 실린 이모티콘이 날아온다.


택시를 타고 조용히 동네 인근에 내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이제 내렸노라, 나는 버스를 놓치지 않고 잘 타서 이렇게 왔다고 지금 가고 있다면서 말한다. 술을 마시는 건 좋은데 시간은 보고 다니라고 한다. 맞다. 맞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버스는 잘 탔으니까. 다만 중간 사정에 대한 보고가 누락되었을 뿐.


다음 날 파란색 장바구니 속에서 한 무거움을 담당하던 파인애플을 씹어먹었다.

엄청 달고 시다. 정신이 확 드는 맛이다.




작가의 이전글 한계는 어디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