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위로가 된 그녀
난 힘든 날이면 자주 할머니를 떠올리곤 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엄마한테 혼날 때 엄마 편을 드셨지 나의 역성을 들어주시던 할머니도 아니었고, 나를 볼 때마다 버선발로 나와 '우리 강아지'하면서 엉덩이를 토닥여주시는 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정말 사랑하셨다는 그 기억이 내 안 깊숙이 뭉근하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사실 우리네 할머니의 모습과는 거리가 한참 먼, 특이한 분이셨다.
소위 K-할머니의 국룰이라고 할 수 있는 뽀글뽀글 파마머리 대신 작은 컬이 들어간 중단발의 스타일을 고수하셨고, 평생 귀도 뚫지 않으셨다. 나의 전화를 받으시거나 멀리서 나를 보시면, 특유의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게 전부셨다. 그리고 해진 저녁이면 주무시는 방에 딸린 작은 베란다에서 창 밖을 바라보며 적당히 무거운 역기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셨다. 그래서인가 동년배의 어르신 보다 허리가 곧으셨고 평균보다 큰 신장이 더욱 꼿꼿해 보이셨던 것 같다. 참 특이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이 어우러져 그녀의 품위를 만들어냈다. (유년시절 우리 엄마에게 종종 '엄마 우리 할머니는 머리가 뽀글뽀글 촌티 나지 않아서 멋져!'라고 말하곤 했다.)
쿨한 서양 할머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K-할머니의 따스한 정은 그녀의 DNA였던 것 같다.
내 어린 시절 그리스로마신화 만화책이 한창 유행이었을 때 그 책을 사주시기 위해 무거운 책 세트를 노끈으로 묶어 갖다 주셨고, 미니마우스 클립에 만원을 끼워 넣고 창 밖 주차장으로 용돈을 던져주셨고, 철이면 철마다 한약을 지어주셨고, 손주 키가 쭉쭉 크라고 아파트 뒷산에서 키 크는데 좋다는 약초를 캐어 즙을 내어주셨고(뚜렷한 효능은 없었다만), 손주 수능을 앞두고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삶 곳곳에, 빈틈없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랑의 흔적이다.
어느덧 그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었고, 노쇠해진 그녀에게 덜 익었지만 온기 있는, 어쩌면 갓 구운 빵 같은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스무 살 무렵 할머니와 호암미술관을 간 적이 있다. 어느덧 할머니보다 훌쩍 큰 나는 할머니의 어깨를 두르고 호암미술관 정원을 산책했고 그 둘의 뒷모습은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 사진 속 그녀와 나의 뒷모습은 참 편안해 보인다. 할머니가 암으로 투병하시던 때 지방에 있는 삼촌 댁을 방문했다. 1박 2일의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힘이 없는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지닌 품위와 자신감을 지켜드리고 싶었다. 숙모에게 부탁하여 할머니 머리를 드라이 해드린 후 터미널로 길을 나섰다. 그날 할머니의 머리는 굽실굽실 풍성했고 부드러운 회색 코트 위에 얹힌 브로치는 할머니의 환한 미소와 같이 고운 빛을 발하였다. 그 모습에 반한 나는 사진을 찍어드렸고 그 사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다.
이 두 개의 일화가 내 성인 시절 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전부이다. 입대 후 훈련소에 있는 동안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짧게 휴가를 내어 병실에 누워계신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느낀 심장의 두근거림과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은, 마치 토네이도 속을 뚫고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훈련소 복귀 규정으로 인해 할머니 장례를 보지 못했고 그 시간은 내 삶에 상처로 남아있다.
요즘 난 또다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우울감이 극에 달해 있고 무력감을 경험하고 있다. 평소라면 불면증이 심해져야 하는데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반대로 잠이 쏟아진다. 어젯밤 일찍 잠이 들었는데 처음으로 할머니가 꿈에 나왔다. 주황색 불빛이 감싸고 있는 거실에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고, 난 소파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누가 들으면 왜 이러냐 할 어조로 '할머니는 나 안 보고 싶었어?'라고 애교 어린 투정을 부렸다. 할머니는 짤막하게 '그래서 저 멀리서 너 부르고 울었지.'라고 답했다. 그렇게 꿈은 끝이 났다.
특이한데 품위 있고 쿨한데 따스한 할머니는 그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한 번도 내 꿈에 나오지 않을까 이상했는데 이제야 찾아온 할머니는 내가 눈물 날 정도로 보고 싶었나 보다. 그녀가 요즘의 나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