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을 중심으로 (2/2)
내가 가다머를 처음 본 것은 1997년 또는 1998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때에 EBS에서 철학에 대한 시리즈를 방영해 준 적이 있었다. 6부작이었던 것 같은데, 당대에 유명한 철학자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했다. 5부와 6부는 가다머가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진리와 방법』의 마지막 부분을 풀어준 것 같았다.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도 그때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지적인 허영심이 대단하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녹화해 놓은 비디오 테이프를 계속 봤었다.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엇이나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이 느끼면서. (철학자들이 얼마나 말을 빨리하는지, 성우들이 엄청나게 빠르게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재미난 일은 거의 20년이 지나서 내가 가다머의 책을 보고 글을 쓴다는 점이다. 나는 철학자 가다머와는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후설의 현상학. 자기소여성과 생활세계
지난번 글에서 후설의 논의로 글을 시작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후설은 현상학자이다. 현상학은 드러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어떤 현상이 발생했을 때에 그 현상의 원인을 찾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다. 현상학에서는 왜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하는가'에 집중한다. 그래서 현상학의 관심은 현상학을 탐구하는 탐구자와 관계한다. 그 시대에 일어나는 일은 그 시대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후설은 자기소여성에서 방법론적 근거를 찾았다. 자기소여성은 다음과 같이 풀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종교나 예술이라는 현상을 분석할 때, 그것을 마르크스나 진화론처럼 사회구조나 생물학적 사실에서 파생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갖고 있는 종교적 체험과 예술적 체험에 나타나 있는 종교적 현상이나 예술적 현상을 분석하고 기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풀어서 옮겨보자면 '그 자체로 주어져 있음' 정도의 의미라 하겠다."(번역자 주)
현상학은 존재(사람)의 모든 것을 배제하는 상황에서 시작해서, 존재가 완전한 객관적인 사고에 이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현상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인간의 주관성조차도 "'현상'으로 간주하여" 객관적인 탐구가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칸트 이전의 데카르트적인 탐구 방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딜타이 또한 후설의 현상학에 기반을 두고 객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철학적인 해석학을 정의했다. 딜타이는 헤겔을 넘어서기 위한 방법으로 후설의 현상학에 도움을 받지만 "결국에는 진정한 역사적 개념의 생생함을 헤겔의 정신 개념으로 인식"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자 했던 딜타이의 노력은 결국 관념론적인 철학으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가다머에 따르면 딜타이는 그 차이점을 잘 구분해내지 못했다.
후설에 따르면, 이 세계는 생활세계, 곧 활동하는 삶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계는 주관적인 영역으로 "가치의 상대성이 구현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서 객관적인 정신활동을 하려고 하는 하나의 주체가 객관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가? 이것이 현상학의 구조 안에서 첨예하게 대립되는 핵심 문제가 된다.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 객관적인 사고의 대립, 그것이 가능할까?
가다머는 딜타이와 후설을 이렇게 평가한다. "딜타이와 후설 모두 삶 개념의 사변적 내용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딜타이는 형이상학적 사고를 논박하는 입장에서만 삶의 관점을 끌어들이고, 후설은 삶의 개념이 형이상학의 전통, 특히 사변적 관념론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가다머는 딜타이와 후설은 여전히 형이상학적 인식론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다머의 책 결론 부분에 '사변적'이라는 말이 다시 정의되는데, 사변적이라는 것은 어떤 가시적인 부분에 얽매이지 않고 고정관념에도 휘둘리지 않으며 사물과 사건을 성찰하는 것을 말한다. 매번 가다머의 글을 인용하는 것은 참 어렵다. 왜냐하면 가다머가 자신의 주장을 결론으로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논의의 과정을 매우 촘촘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르크 백작. 하이데거가 주목한 독창적인 사유자
하이데거는 요르크 백작이 딜타이를 넘어선다고 여겼다. 가다머는 딜타이의 문제점이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성급하게 정신과학(인문과학)으로 끌어당긴 것으로 보았는데, 요르크 백작은 그것을 넘어선다고 평가한다. "요르크 백작은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후설의 선험적 주관성의 현상학을 연결해주는 가교를 놓는 데 성공했고, 그것은 요르크 이전의 철학에서는 불가능했던 작업이었다." 가다머에 따르면, 요르크 백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삶에서 영향을 받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에게 낯선 타자로부터 삶의 자양분을 얻는다. 살아 있다는 것의 근본사태는 동화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구별짓기는 동시에 구별짓기가 아닌 것이기도 하다. 낯선 타자가 자신의 것으로 전유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안에서 제공받는 정보는 누군가의 의해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같은 세계 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영향은 동시에 우리가 타인에게 주는 영향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삶 안에서 묶여 있으며,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사변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요르크 백작은 헤겔이 삶을 변증법적 형이상학으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하는데, 요르크 백작 자신이 그러한 문제점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생각이었는지에 관해서는 그의 미완의 유고작도 말해주는 바가 없다."
하이데거. 세계 내 존재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원적인 실현형식을 세계 내 존재"로 보았다. "이해라는 것은 실용적 목적이나 이론적 관심 여하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분화될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해가 존재의 능력 내지 '가능성'인 한에서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요르크 백작에서 시작된 독창적인 사고는 하이데거로 이어진다. 하이데거는 존재(사람)를 세계 안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았고, 존재는 시간 안에서 존재 가치를 획득한다. 리쾨르에 의하면 시간은 이야기와 관련이 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과정이 곧 존재의 존재방식으로 정의된다. 다시 말하면 사람(존재)은 자신이 겪는 상황을 이해하는 가운데에서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해있음을 깨닫게 되고, 세계 안에서 이해되고 있는 상황으로 다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재(사람)가 어떠한 선입견 없이 사건이나 상황, 또는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다. 왜냐하면 존재(사람)는 세계에 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발을 담기 이전의 어떤 상황을 상정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러한 부분이 선험적인(경험으로 알 수 없는, 그렇지만 있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근거한다고 할지라도 논의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알 수 없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해는 선입견으로 시작한다고 말한다. 선입견은 해석학적인 지평을 확장시키고 철학의 근본적인 물음을 견고하게 만든다. 선입견이 이해를 돕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선입견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가다머는 이것을 "해석학적인 순환"이라고 하는데, 이 해석학적 순환이 이해를 확장시키고 이해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가다머. 역사성과 영향사적 의식 그리고 언어
역사성
선입견은 역사적인 것을 근거로 한다. 가다머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들은 틀린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이해의 지평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텍스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진리를 담고 있는데, 그 진리는 전통적인 이해 방식과 결합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역사적인 성질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인 이해의 형식을 갖출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견고하다.
영향사적 의식
영향사적 의식은 곧 우리가 경험하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연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경험은 우리의 기억 속에 보존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기억은 떠올리는 것인데, 그 기억은 대상을 명확하게 지시하거나 그려내지 못하는 상황으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어떤 경험이 반복되게 되면, 그 경험이 유사하지 않더라도 그 경험이 가지는 유사한 틀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경험은 "모든 상황에서 구속력을 갖는" "경험의 보편성"이 된다. 경험은 이전까지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기대하게 만들고, "한계를 통찰"할 수 있게 돕는다. 그래서 "해석학적 경험은 전통의 전승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전승은 언어와 관련이 있다.
언어
언어는 전통을 잇는 역할을 하는데, 전통을 잇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일정한 관계를 맺는 것에서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올 때 그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한다면, 일정한 관계가 시작된다. 그 관계에서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대화가 시작되는데, 그 대화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이해의 시간을 갖는다. 따라서 내가 아닌 것을 경험하는 독특한 사건들은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는 이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가다머는 언어 자체에 어떤 객관적인 성질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언어는 이해를 돕기 위한 매개의 역할을 한다. 그 점이 리쾨르의 철학적 해석학과 다른 점이다. 언어에 대한 관점이 해석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리쾨르의 논의로 시작하겠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
가다머가 말하는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진리와 방법』의 부제이기도 하다)을 밝히기 위한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그렇다면 그 "기본 특징들"이 무엇이냐고? 이것은 "철학적 해석학에 관련하여(7/7)"에서 다루려고 한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은 7번째 글에서 그리고 다음으로 시작하는 "제시문 이해의 기본 원칙들"이라는 글에서 다시 한번 쉽게 풀어가겠다. 우리의 목적은 대입 논술을 쉽게 접근하기 위함에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