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쾨르의 『텍스트에서 행동으로』 + 『해석의 갈등』을 중심으로 (1/2)
가다머는 해석이란 이해의 과정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해석하는 과정 즉 해석학적 순환에 따라서 이루어지고, 해석은 전통의 전승과 관련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가다머는 텍스트는 일종의 대화인데, 대화가 시작되면 텍스트가 말을 걸어오고, 텍스트가 말을 걸어오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의 선입견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은 나의 다음 글 "제시문 이해의 기본 특징들"에서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적용할 계획이다.
이번 글과 다음 글은 리쾨르의 철학적 해석학을 다룬다. 리쾨르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전통을 잇지만, 분석철학자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객관성을 입증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언어의 객관성 확보 - 미국의 분석철학과 유럽의 해석학
미국의 분석철학은 매우 독특한 토양에서 시작되었다. 분석철학은 언어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이 철학은 유럽과 연결되지 않은 독특한 철학인데, 리쾨르는 해석학과 분석철학을 연결해서 텍스트 이해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가다머에 의하면 언어는 단순한 매개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여겼지만, 그 부분은 텍스트 해석의 객관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게 된다.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는 매개(언어)로 이해의 과정이 진행된다면,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에 불확실성이 가중될 수 있다. 물론 가다머가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다머는 이해의 장벽은 끝없이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열린 사고와 열린 대화를 통해서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고 믿었다. 나도 그렇다고 믿는다. 나도 그 점을 근거로 수업을 진행하니까. (지금은 분석철학이 시들해졌다. 리쾨르를 전공한 분에 의하면 자신은 분석철학을 하려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는데, 분석철학과 관련된 사람들이 대학에서 모두 사라지는 것들을 눈으로 보았다고 말해주었다.)
텍스트의 사물
리쾨르의 탁월성은 두 대륙을 연결하는 작업에서 빛이 난다. 리쾨르는 프랑스 대학교에서 벌어지는 시위 이후로 미국 시카고 대학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분석철학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 부분은 『폴 리쾨르 - 삶의 의미들』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럽 대륙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분석철학을 소개하고, 분석철학을 해석학에 접목한다. 가다머는 현상학(완전한 객관성의 확보에 중점을 둔)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리쾨르는 현상학에 근거하여 언어를 통해 객관성의 확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가다머가 정립한 해석학의 이론을 따른다. 나는 '해석학적 순환'에 따라, '전통에 따라', '그 시대에 맞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리쾨르의 성찰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조금 더 논의되어야 하는 부분을 강조한다. 리쾨르는 텍스트와의 "거리두기"가 텍스트 이해에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괄호 안에 넣은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넣은 설명이다.
"『진리와 방법』의 제3부 전체는 <우리는 대화이다>(사람은 대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라는 명제와 우리도 동의하는 선행이해(하이데거가 말하는 선입견)를 열성적으로 옹호한다. 그러나 언어적 경험이 그 매개적 기능을 실현하는 것은, 대화를 이끌어 가는 말하는 것 앞에서, 대화 당사자들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성이 기록성이 될 때, 달리 말하면 언어에 의한 매개가 텍스트에 의한 매개가 될 때, 말하여진 것이 대화자들을 지배한다는 것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떨어져서 소통하게 하는 것은 <텍스트의 사물>이며, 텍스트의 사물은 저자에게도 속하지 않고 독자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박병수∙남기영 역)
텍스트를 기록한 사람의 의도는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의도를 찾아가는 것이 독자의 몫인데, 저자가 어떤 의도를 전달했는지는 독자는 알 수 없다. 가장 근접한 의도를 쫓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 확보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텍스트는 변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주물러서 변형이 가능한 지점토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텍스트만이 객관성을 유지하게 된다. 리쾨르는 이것에 주목해서, 텍스트를 "사물"로 보았다.
리쾨르는 『진리와 방법』이라는 가다머의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가다머의 논의를 따른다면, 진리를 선택하거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비판한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태도를 실천하지만, 인문과학(정신과학)의 객관성을 포기"해야 된다고 말한다.
텍스트의 거리두기
나는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철학자들이 예술을 분석하고 사랑하는 것처럼(물론 플라톤은 예외). 예술작품을 보면, 그것이 예술작품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실제와 완전하게 똑같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삶과는 조금 다른 영역에 속한다. 심지어 사진전展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이 액자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작품이 된다. 우리의 삶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도 그것을 내 것으로 품을 수도 없다. 그것은 곧 예술작품이다. 그렇지만 액자 안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 예술작품은 나의 삶으로 들어온다.
리쾨르는 그것을 텍스트의 "거리두기"라는 것으로 표현한다. 텍스트는 이미 객관성을 확보해 놓고 있는 성질을 지닌다. 위의 인용문처럼, 텍스트를 놓고 깊은 대화를 하게 될 때 즉 "언어에 의한 매개가 텍스트에 의한 매개가 될 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사라진다. 완전한 몰입이 가능하게 근본적인 이유는 대화하는 사람 사이에 객관성을 확보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객관성이 확보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언어의 역할에 근거한다.
언어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과정 이후에 강조되는 것은 텍스트의 역할이다. '텍스트의 역할'은 "거리두기"의 개념에서 더욱 명쾌해진다. "거리두기"는 다음과 역할은 하게 된다.
텍스트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
위에서 말하는 <자기>는 텍스트의 <사물>에 의해서 구성된다.
텍스트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은, 일종의 <자아>의 변형인데 이것은 <거리두기를 계산하고 있는> 변형이다.
따라서 이해는 텍스트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인 동시에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텍스트에 의해서 자신이 바뀌어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물론 예외도 있다. 돈키호테가 그런 사람이다. 나중에 텍스트의 거리두기 관점에서 『돈키호테』를 분석하고 싶다. 돈키호테의 유언에 따르면, 돈키호테는 자신을 텍스트와의 거리두기를 실패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가다머는 그런 것을 인지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을 신의 관점을 취하는 사람이거나 사탄 루시퍼의 관점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세계 전체가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신을 신과 동격에 놓으려는 입장이다." (임홍배 역) 그러므로 거리두기를 통해서 텍스트는 그 자체로 객관성을 확보하게 된다.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우리의 과제는 더욱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텍스트 자체가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더욱 명확해졌다. 그것은 텍스트가 의도한 것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