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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aytowin Jul 10. 2019

철학적 해석학에 관련하여 (6/7)

리쾨르의 『텍스트에서 행동으로』 + 『해석의 갈등』을 중심으로 (2/2)

대학원 때에 리쾨르를 전공한 분과 같이 스터디를 할 때였다. 『텍스트에서 행동으로』를 읽고 나는 굉장한 충격에 빠졌는데, 텍스트의 객관화 때문에 저자와 독자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지점이 발생한다는 부분을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충격에 빠진 이유는 이제까지 내가 생각했던 역사와 이야기의 차이점이 사라지고, 신앙과 진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충격에 빠졌던 나를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이용'해서 교조적인 관점으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충격에 빠진 나는 물었다.


나: 그럼 저자의 의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텍스트를 누가 기록했는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리쾨르 전공자: 저자의 의도는 사라졌죠. 누가 기록했는지도 중요하지 않고요.

나: 돌겠네요. 그럼 아무리 해석을 잘해도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건가요?

리쾨르 전공자: 그렇지 않죠. 정말 해석을 잘했다면, 그것이 바로 저자의 의도라고 볼 수 있겠죠.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안에서 본다면요.


그때의 대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해란 무엇인가, 텍스트는 무엇인가, 왜 텍스트에서 행동으로 라는 제목으로 논문집을 펴냈는가,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철학적 해석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를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



『텍스트에서 행동으로』

이번 글은 『텍스트에서 행동으로』의 제2부를 다룬다. 2부의 제목은 '텍스트의 해석학에서 행동의 해석학으로'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서 다루는 내용은 텍스트 해석은 존재론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고 이해와 적용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가다머의 논의를 따르고 있다.



텍스트란 무엇인가?

텍스트는 고정된(fixed) 말하기이다. 말하기가 활자를 이용해서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것을 말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쓴 글을 다른 사람들이 자신처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자유롭게 글을 쓰는 동안 때로는 이야기의 진행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글을 쓰는 동안에는 말하기처럼 글쓰기가 자유로워진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말하기의 언어적인 성질이 텍스트로 고정되는 순간 기록성을 가지는 특이한 지점이 발생한다. 리쾨르는 이것을 "텍스트가 말하기의 자리를 대신할 때 언어와 세계의 지시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대변동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리쾨르는 "기록은 그것이 도형이든 문자이든, 말하기를 기록하는 것이며, 그것은 조형(물)의 존속적 성질에 힘입어 말하기의 지속성을 보장한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조형물을 볼 때에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나 생각들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실제적인 부분을 모방했다는 점에서 실제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보면 미켈란젤로가 어떤 모델로 다비드 상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비드 상의 모습은 미켈란젤로가 온전히 창조해 낸 것이 아니다. 적어도 머릿속에 있는 모델의 모습은 어떤 사람의 모습들을 담고 있다.




텍스트는 열려 있다

지난번 글에서 리쾨르가 강조한 것은 언어를 통한 텍스트의 객관성 확보였다. 텍스트를 이해할 때에 두 가지 관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고정된 텍스트를 다룰 때에

1. "우리는 독자로서 텍스트의 구조를 설명함으로써,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다."

2. "우리는 텍스트를 말하기 속에서 완성하고 그것을 살아 있는 의사소통으로 복원시킬 수 있다."


1은 언어학에 근거한 구조주의적 관점이고, 2는 철학적 해석학의 관점이다. 구조주의는 언어를 구조화해서 비교할 수 있게 만든다. 음소와 단어를 비교하고, 단어와 문장을 비교한다. 이 원리를 통해서 텍스트 자체를 구조화할 수 있고, 그것으로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이것은 자연과학의 방법이다. 반면에 철학적 해석학은 고정된 텍스트의 "정지 상태를 연장하고 강화"하지 않는다. 철학적 해석학에서는 텍스트 자체가 열려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를 대하는 사람과 연결되고, 그 사람이 속한 세계와도 연결된다. 그래서 "하나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은 한 주체의 자기 해석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 주체는 그때부터 비로소 자기를 더 잘 이해하고, 자기를 달리 이해하고, 또는 자기를 이해하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리쾨르는 더 나아가 두 가지 관점이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 호 arc>를 따라 대립적 태도를 통합시키고자 한다. "설명하는 것은 구조를 밝히는 것, 즉 텍스트의 정역학을 구성하는 내적 의존 관계를 밝히는 것이고, 해석하는 것은 텍스트에 의하여 열린 생각의 통로를 따라가는 것, 즉 텍스트의 방향 제시에 따라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텍스트는 저자의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독자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해석학적 호는 비유인데, 두 가지 방법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하나로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리쾨르에 의하면 해석은 수면 아래에 있는 심층 의미와 수면 위의 의미를 모두 다루어야 한다. 이 비유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수면 아래에부터 의미를 끌어오는 작업이 고정된 텍스트를 역동적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처럼 느낀다.)



탈심리화

"해석은 접속과 재생의 구체적인 결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심리적인 과정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해석에 관하여』에서 "목소리가 표현하는 말소리들은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들이며 글로 씌어진 단어들은 말하기에서 발화된 단어들의 상징이다."라고 말한다. 리쾨르는 "언어에 <대한 on> 해석이기에 앞서 언어에 <의한 by> 해석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리쾨르는 분석철학자 퍼스의 도움을 받아서, 사물-기호-해석의 삼각관계 구축한다. 기호와 사물이 맺는 관계를 "완벽하게 인식하고만 있으면" 해석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된다면, 말과 말을 이어주는, 기호와 말을 이어주는 사고 과정에 놓여 있다면, 정확하고 객관적인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탈심리화 과정이 일어난다. 이것은 개인의 감정적 이끌림에 의해서나 주관성에 의해서 일어나는 과정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낭만주의 해석학에서 말하는 "작품을 낳은 창조 과정을 재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중개과정

리쾨르에 의하면 "해석학의 전체 이론은 텍스트가 텍스트 자체에 작용하는 과정, 즉 일련의 해석 경향에 의하여 이 해석-자기화 과정을 중개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구조주의와 철학적 해석학의 대립을 넘어서, 텍스트를 대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스스로가 텍스트 앞에서 텍스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과정 가운데에 놓인 것은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철학적 해석학이 특정한 방법으로 그 과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가다머에 의하면 텍스트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텍스트를 변형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해석자의 몫이 아니다. 텍스트가 말을 걸어오고 우리가 텍스트에게 말을 걸 때에 대화가 시작된다.


리쾨르는 "자기화는 텍스트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 태동하고 있는 것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볼 때, 그것은 이미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해석자가 말하는 것은 일종의 다시 말하기이며 그것은 텍스트가 말하는 것을 부활시킨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텍스트에서 독특한 것을 발견했다고 여길 때에 가장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자의적인 의미를 부여한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수업에서 상상력 제한시키기라는 말을 사용한다.) 가다머가 전통의 전승에 따라야 함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독특한 존재인 것 같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각에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이다. 따라서 해석을 한다는 것은, 말했던 것(고정된 것)을 말하는 것(역동적인 것)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운데에 자신의 생각이 덧붙여질 수도 있겠지만, 전달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본래의 이야기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을 Hermeneutics라 부른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뜻을 곡해하거나 자의적으로 전달하는 자가 아니다.



한 작품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담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자유롭게 글을 썼다고 여기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생각을 담게 된다. 하나의 작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작품 안에서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독자는 글을 기록하는 사람의 작품을 하나의 이야기가 담긴 글로 파악할 수 있다.


이제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논의가 끝난 것 같다. 텍스트의 성질에 대해서 다루었고,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철학적 해석학에서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해석 방법이 아니라 특징들에 대해서 다루는 이유도 분명해졌다.


나는 가다머의 논의와 리쾨르의 논의가 대입 논술을 준비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대입 논술의 제시문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적용한다. 다음 글에서는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고 요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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