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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

O Come, O Come, Emmanuel

엄마가 좋아한 노래

by Essie

Emmanuel. You came to die for me, just as my mother gave her life.

기분 가라앉았다고 대답하는 톤이 ㄱㅆㄱㅈ였다..

엄마의 마지막 메시지는 "암! 이것 먹으면 낫는다" 링크.
난 열어보지도 않았다. 자신을 욕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녀는 매번 나에게 져 줬고 온힘 다해 헌신했고
모든 것을 희생했고 죽기 직전까지 배려만 하고 갔다.

유언까지 온통 배려와 희생이었다.
그점이 나를 미치게 한다.

난 엄마 수술도 안 시킨 몹쓸 이상주의자일 뿐이었다.
그녀는 내게 죄책감 가지지 말라는 말을 힘겹게 했다.

"넌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했다.
난 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가장 괴롭게 한다.

엄마가 좋아했던 노래를 혼자 불렀다.
좋으면 좋을 수록 더는 부를 수 없었다.

서로 만난 적 없는데 엄마가 좋게 생각하던 친구가 있었고,
친구는 우리 엄마를 위해 매일 아침 기도를 하기도 했다.

"엄마가 보기엔 네가 너무 날을 세우는 것 같아. 들어보니, A는 천사네~. 사과하고 화해해~ 얘,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했다가는 우리 딸 옆에 사람이 하나도 안 남을까 봐 걱정된다~.. 엄마는 우리 딸한테 그런 좋은 친구가 생겨서 참 좋아."

수술 적합 검사 과정 중 갑자기 듣게 된 말,
"간암말기. 호스피스 연결.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직후에도 엄마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 친구 집 앞에 사과편지를 두고 오도록 들르게 했다. 엄마는 바로 그날부터 걸을 수 없게 된 지경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나의 화해를 도와 주셨다.

친구가 O월에 OO에 와서 함께 연주하기로 했다. 멀고 바쁠테니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꺼이 두 번 다 하겠다 하였다. 곡을 상의하자, 전적으로 나를 믿는다는 말에 고마우면서도 내심 부담이 되었다. 내가 음악적으로 웬만해서 보지 않는 '눈치'가 약간 보이는 상대라.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사이 다시 위기가 왔고, 이 편곡도, 연주도, 친구도 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보다 훨씬 위태로운 나를 보았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부터, 하루에 열 번 이상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이 터지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마 장례식에 안 왔다면, 우리 엄마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았다면, 마지막 열흘 간의 세심한 조언이 없었다면 혹시 외면하기 쉬웠을까. 화해하기로 마음 먹고 이 노래를 택한다.

엄마가 좋아했던 곡. 나도 좋아하는 곡.

편곡이 안 되는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마음 때문임을 알고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다.
아침 잠에서 깨기 직전 하나님이 다음 테마를 들려주셔서 그대로 남겼다. 이렇게 듣기는 조금 오랜만이었다. 하기 싫어도, 아무리 괴롭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도, 바로 그 날, 바로 이 곡을, 바로 그 친구와 하라는 뜻이었다.

나를 포기하고 화해의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자, 편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신이 나에게 들려준 그 다음 멜로디는 저 앞부분과 맞춘 퍼즐처럼 이어졌다. 그 다음부터는 손이 가는대로 치니 그대로 좋았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앉으면 바로 되는 편곡, 손 가는대로 기억하면 되는 나의 제자리로. 그러나 더는 앉을 수 없었다. 뒤로 갈수록,좋은 소리가 들릴 수록, 나는 사무치는 괴로움에 더는 연주할 수 없어 밥만 먹었다.

이 곡을, 이 친구와 한다는 것조차 한편 여러 심정이 스친다. 다른 건 몰라도, 엄마가 있었다면 반드시 직접 들었을 텐데.

곡도 연주도 그리고 친구도, 엄마가 좋아해 줬을 텐데.
엄마 없이 아무리 좋은 곡을 편곡하면 뭐하나, 하면서,
울며 손이 가는대로 피아노를 치면, 그게 내 편곡이다.


친구에게 화해의 손은 다시 내밀었으나,
그 손을 잡지 못하도록 호주머니에 잠시만 넣기로 했다.

현재의 나는 친구뿐 아니라, 누구도 만날 수 없다.

나는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


by Ruth

엄마는 배우지도 않고 처음 그리는 그림을 이렇게 잘 그렸다.

꼭 자기처럼 예쁘고 수줍고 아름다운 꽃을 그렇게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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