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잉글랜드의 비바람 치는 황야에서 마을로 돌아와 먹는 홍차와 스콘이 세상 어떤 진수성찬보다 더 맛있듯이, 색채도 온도도 차갑디 차가운 북유럽의 도시에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소중하듯이, 살거나 여행하거나 대체로 쇠심줄 같은 무딘 신경과 체력이 필요한 미국 대륙에서 뉴잉글랜드의 아기자기함과 편안함은 분명 특별하다.
‘뉴잉글랜드’는 미국 대륙의 북동쪽 끝에 있는 여섯 개의 주(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 로드 아일랜드, 코네티컷)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빌 브라이슨은 노상 미국의 지역 이름은 유럽 동네의 재활용 이름이거나 사대주의 이름이라고 툴툴거렸는데, ‘뉴잉글랜드’는 재활용의 끝판왕 아닌가! 그런데 막상 가보면 이 이름이 왜 나왔는지가 스르르 이해된다. 여하튼 이해된다.
업스테이트 뉴욕에 살았던 우리에게 뉴잉글랜드는 가까워서 자주, 꽤 여러 곳에 놀러갔었다.
물론 뉴잉글랜드라고 지칭되는 지역도 넓어서(중서부, 서부에 비하면 크기가 비교가 안되긴 하지만) 한 두 가지 특성으로 이 지역 모두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유럽을 뺨치는 성과 대저택이 즐비한 로드 아일랜드, 그야말로 첩첩산중인 진정한 시골 뉴햄프셔, 업스테이트 뉴욕의 공기도 탁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청정지역 메인, 세련된 소도시와 학교가 많은 매사추세츠, 살짝 제주도를 닮았고 조금 덜 잘살아 보이지만 평화로운 버몬트… (코네티컷은 상대적으로 덜 가봐서 딱히 특징을 집어내기 어렵다. 예일대가 있는 뉴헤이븐 정도만 가봤는데, 여긴 우범지대가 많다고 해서 인상이 안 좋기도 했고)
뿐만 아니라 뉴잉글랜드의 각 주안에도 다양한 장소들이 있으니 일반화는 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잉글랜드’는 ‘잉글랜드스럽단’ 말이다! 영국인이 보면 어디가 그렇냐고 하겠지만. 어쩌면 “.. 스럽다”는 표현은 진짜 그렇다기보다는 “분명 다른데, 또 비슷한” 그 아리송한 느낌을 지칭하는지도 모른다.
- 이 동부 지역이 아주 옛날에는 유럽 대륙과 붙어 있었을테니 이 ‘비슷함’은 사실 이상하지 않다. 마치 남미 대륙에서 튀어나온 부분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쑥 들어간 부분과 퍼즐처럼 모양이 맞고 실제로 두 대륙 사이에 비슷한 풍경이 존재하듯이… -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녹음이 우거진 이 경치 좋은 지역을 놔두고 어떤 사람들은 왜 황량한 서쪽으로들 갔냔 말이다. 금을 찾아서? 그냥 살기 좋은 곳에 눌러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역시 신대륙에 온 사람들은 개척 정신이 남달랐던 모양.
물론 뉴잉글랜드의 겨울은 매우 춥다. 눈도 많이 온다. 하지만 추워도 황량하지 않다. 예쁜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안락한 불빛이 있는 실내에 머물면서 달콤한 코코아를 마시며 버티면 된다. 제설차를 몬다던가 암튼 기후와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덴마크는 아니지만 ‘휘게스러운’ 생활이 가능하다. 기분 탓인지 심지어 제설차 모는 사람들도 왠지 여유로워보인다.
봄이 지나 여름이 오면, 뉴잉글랜드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직사광선을 피할 길 없는 중서부와 서부에서는 작열하는 태양이 기승을 부리지만, 나무가 많은 뉴잉글랜드의 소도시들에는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지고 꽃이 피고 반짝이는 녹색의 축제가 벌어진다.
우리가 살았던 뉴욕주는, 매사추세츠주와 붙어 있으니 얼핏 비슷할 것 같지만, 사실 주 전체로 볼 때 아기자기한 동네가 얼마 없다. 특히 거친 산맥이 관통하는 뉴욕주의 중심부는 가난하고 척박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거기에 비해 매사추세츠나 뉴햄프셔의 시골은 얼마나 예쁜지! ‘아름다운 시골’은 여기를 일컫는 말인 듯하다. 사실 중서부와 서부의 황야나 사막에 ‘시골’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리넨 원피스와 밀짚모자를 쓰고 전원생활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시골스러움’은 뉴잉글랜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