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여행
대평원에 진입하기 전, 세인트루이스를 지나가기 전에 들렀던 도시 피츠버그에 대한 이야기.
애팔래치아 산맥이 관통하는 펜실베이니아주의 중심부는 직각형의 거칠고 못생긴 산들이 늘어선 곳이었다. 미적 감각에 상당히 손상을 입은 채 주의 거의 서쪽 끝에 있는 피츠버그에 도착했다. 철강왕 카네기 말고는 이 도시에 대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는데, 철강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 달리 다운타운은 상당히 정돈되고 쾌적한 느낌이었다. 또한 광막한 중서부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동부스러운’ 도시였다. 더 정확히는 피츠버그를 떠난 후에야 그렇다는 걸 알았다. 동부스럽다는 건 무엇보다 건물이나 길의 아기자기함, 그리고 뭐랄까, sofistcated 한? 문명적인? 그런 느낌을 말한다. (어디까지나 뇌피셜)
뉴욕이나 시카고 정도로 멋진 건물들이 즐비하진 않지만 그 두 도시에서 볼 수 있는 20세기 초 아르데코풍 건물들도 은근 있었다. 게다가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데 다운타운에 사람들이 걸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안전하다는 이야기다.
소위 ‘rust belt’*라고 불리는 지역에 속한 만큼, 이 도시가 원래 이랬던 건 아니라고 한다. 1970년대 이후 철강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쇠락해갔던 이 도시를 부흥시킨 것은 인공지능/로보틱스 과학과 생명공학이라고. 이 분야는 현재 이 지역이 전미 톱클래스라고 한다. 그 중심부에 카네기 멜론 대학이 있다.
피츠버그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이름은 앤디 워홀! 이 도시가 아직 철강산업의 중심지일 때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다는 걸 희미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앤디 워홀 미술관이 떡 하니 서 있는 것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미술관에는 워홀의 전형적인 실크 스크린 작품들만이 아니라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설치 작업들과 영화들도 있었다. 워홀의 작품에 등장하는 ‘하인즈 케첩’의 고향이 바로 피츠버그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지금도 하인즈 케첩은 그야말로 전미 레스토랑들의 독점 상품인데…)
카네기 가문만큼이나 피츠버그의 역사와 함께 한 하인즈 가문의 이름은 이 지역 풋볼팀인 피츠버그 스틸러스(이름 참 단순. 포항 스틸러스는 이 이름의 벤치마킹인가)의 홈구장인 하인즈 필드(Heinz Field)에도 있었다.
검색을 해보니 지금은 하인즈 필드의 소유주가 바뀌어서 애크리슈어 스타디움(Acrisure Stadium)이 되었다는데, 발음도 어렵고 낯설어서 오랜 팬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고… (이런 거 보면 진짜 미국은 얄짤없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팬들보다 기업이 우선이다)
하인즈 필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촬영지라고도 한다(이래 저래 이 여행에서 이 영화가 여러 번 등장했다). 안에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외관만 봐도 위용이 엄청나다. 풋볼 경기장에 가보면 미국이 고대 로마의 직계 후예처럼 보인다. 이 거대한 스타디움들은 진정 현대의 콜로세움이다.
그런데 피츠버그 여행의 숨은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야경. 인근 업타운에 사시는 지인의 지인댁에 잠시 들렀을 때 알았다. 야경 뷰포인트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해 진 뒤 나지막한 산 위로 차를 몰고 올라갔다.
피츠버그는 세 강 - 엘리게니(Allegheny), 모논가힐러(Monongahela), 오하이오(Ohio) - 이 합류하는 지점이어서 산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저 멀리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점점이 불빛이 반짝였다. 고층 전망대에서 보는 질서정연한 도시의 야경(예컨대 시카고 같은)과 달리, 구불구불한 길들은 느긋하고 낭만적인 느낌이었다. 이 날은 마침 불꽃놀이를 하고 있어서, 하늘에도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불빛들이 반짝였다.
어딘지 꿈같은 이 시간에, 우리의 여행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음을 실감했다. 아마도 또다시 갈 일이 거의 없을 도시 피츠버그에서 구경한 아련한 불꽃놀이.
*러스트 벨트
https://ko.m.wikipedia.org/wiki/러스트_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