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여행
가족과 함께 미국에 잠시 살던 시절 - 1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방학을 이용해서 뉴욕주를 출발,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티까지 자동차로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거대한 북미대륙에 대해, 그 여행의 위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무식하게 떠났다. 이 장구한 여정이 결국 뜻하지 않은 사고로 축소된 것은 운만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 탓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대평원(Great Plains)을 달렸던 며칠 동안의 경험은 전혀 몰랐던 세계를 내게 보여주었다.
네브래스카의 오마하를 출발, 배드랜즈 국립공원(Badlands National Park) 인근까지 올 동안 풍경이 계속 이런 식이었다. 오마하 근처에는 그래도 간간히 나무도 있고 농장도 있고 약간의 굴곡도 있었는데 사우스 다코타에 들어서면서 길은 끝없이 뻗은 거대한 비행기 활주로처럼 변했다. 왜 이 거대한 텅 빈 공간은 시원함보다는 숨막힘을 느끼게 하는 걸까? 경치를 감상하려고 차에서 내리자 마치 물속에 들어온 듯 심장의 압박이 느껴졌다. 해가 지고 나니 크기와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들이 사라지면서 차가 우주 속에 난 길을 달려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내가 느낀 압박감은 나의 신체라는 작고 연약한 존재가 바람에 날려 먼지처럼 흩어질 것 같은 위기감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지지대와 방향과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좌표가 사라진 거대한 공간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숭고 아닐까? 하지만 길 위에서는 그런 미학적 개념 따위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항상 뒷북을 친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우리는 지금 대평원의 한가운데에 있다. 며칠 동안 이런 풍경 속을 계속 달리게 될 것이다.” 당시의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이럴 수가... 믿을 수 없어...!! 믿을 수가 없어!” 우리는 이 말을 되풀이했다.
사우스 다코타의 텅 빈 황야는 그야말로 “와일드 웨스트”의 상징 같은 주 와이오밍의 거칠고 광막한 길로 이어졌다. 와이오밍은 산악지대로 인식되어 있지만 대평원에 속한 지역도 있었다.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땅의 야생성은 사우스 다코타보다 더 심했다. 사우스 다코타와 와이오밍을 지나고 나니, 네브레스카는 상대적으로 풍요한(!?) 땅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긴 적어도 푸른빛이 있었다. 뉴욕주에선 네브레스카를 오지의 대명사처럼 이야기하던데, 네브레스카의 명예회복이 시급하다.
나에게 대평원은 어디를 가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지였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C 교수님께 “미국에서 가장 평평한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던졌다. “캔자스”라는 답변이 돌아오자 나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가장 평평하면서 가장 황량한 곳은 어디인가요?” “사우스 다코타”. C 교수님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셨고, 난 그럼 그곳에 가겠다고 말했다. “거긴 왜? 거긴 아무것도 없어요(There is nothing). “아무것도 없음, 난 그게 좋아요.(I like nothingness).
좁은 한국땅에서 이전투구하는 삶이 갑갑하다고 느낄 때 종종 이 대평원의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일까, 사람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너무 많아서일까. 한국에서 사는 이상 인간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꼬여있고 히스테릭하다.
대평원에서의 경험은 세상이 지극히 명료하게 보이는 놀라운 순간을 내게 선사했다. 그곳엔 과연 아무것도 없었지만, 또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곳에는 죽음과 삶이라는 단순한 두 항 사이에 세계가 존재했다. 그곳에서 나는, 지평선 너머로 모든 존재가 소멸하기 직전, 시간과 공간이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건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여행시기 : 2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