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dshoes Jan 30. 2019

Great Plains,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

미국여행

가족과 함께 미국에 잠시 살던 시절 - 1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방학을 이용해서 뉴욕주를 출발,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티까지 자동차로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거대한 북미대륙에 대해,  여행의 위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무식하게 떠났다.  장구한 여정이 결국 뜻하지 않은 사고로 축소된 것은 운만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 탓이었다. 하지만  여행은  후로도 오랫동안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대평원(Great Plains) 달렸던 며칠 동안의 경험은 전혀 몰랐던 세계를 내게 보여주었다.



네브래스카의 오마하를 출발, 배드랜즈 국립공원(Badlands National Park) 인근까지 올 동안 풍경이 계속 이런 식이었다. 오마하 근처에는 그래도 간간히 나무도 있고 농장도 있고 약간의 굴곡도 있었는데 사우스 다코타에 들어서면서 길은 끝없이 뻗은 거대한 비행기 활주로처럼 변했다. 왜 이 거대한 텅 빈 공간은 시원함보다는 숨막힘을 느끼게 하는 걸까? 경치를 감상하려고 차에서 내리자 마치 물속에 들어온 듯 심장의 압박이 느껴졌다. 해가 지고 나니 크기와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들이 사라지면서 차가 우주 속에 난 길을 달려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내가 느낀 압박감은 나의 신체라는 작고 연약한 존재가 바람에 날려 먼지처럼 흩어질 것 같은 위기감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지지대와 방향과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좌표가 사라진 거대한 공간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숭고 아닐까? 하지만 길 위에서는 그런 미학적 개념 따위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항상 뒷북을 친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우리는 지금 대평원의 한가운데에 있다. 며칠 동안 이런 풍경 속을 계속 달리게 될 것이다.” 당시의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이럴 수가... 믿을 수 없어...!! 믿을 수가 없어!” 우리는 이 말을 되풀이했다.


사우스 다코타의 텅 빈 황야는 그야말로 “와일드 웨스트”의 상징 같은 주 와이오밍의 거칠고 광막한 길로 이어졌다. 와이오밍은 산악지대로 인식되어 있지만 대평원에 속한 지역도 있었다.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땅의 야생성은 사우스 다코타보다 더 심했다. 사우스 다코타와 와이오밍을 지나고 나니, 네브레스카는 상대적으로 풍요한(!?) 땅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긴 적어도 푸른빛이 있었다. 뉴욕주에선 네브레스카를 오지의 대명사처럼 이야기하던데, 네브레스카의 명예회복이 시급하다.


나에게 대평원은 어디를 가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지였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C 교수님께 “미국에서 가장 평평한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던졌다. “캔자스”라는 답변이 돌아오자 나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가장 평평하면서 가장 황량한 곳은 어디인가요?” “사우스 다코타”. C 교수님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셨고, 난 그럼 그곳에 가겠다고 말했다. “거긴 왜? 거긴 아무것도 없어요(There is nothing). “아무것도 없음, 난 그게 좋아요.(I like nothingness).



좁은 한국땅에서 이전투구하는 삶이 갑갑하다고 느낄 때 종종 이 대평원의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일까, 사람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너무 많아서일까. 한국에서 사는 이상 인간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꼬여있고 히스테릭하다.


대평원에서의 경험은 세상이 지극히 명료하게 보이는 놀라운 순간을 내게 선사했다. 그곳엔 과연 아무것도 없었지만, 또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곳에는 죽음과 삶이라는 단순한 두 항 사이에 세계가 존재했다. 그곳에서 나는, 지평선 너머로 모든 존재가 소멸하기 직전, 시간과 공간이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건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여행시기 : 2012.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