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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hoes Jan 14. 2024

Chopin Nocturne op.9 No.2

쌩초보의 피아노 연습

건강 때문에 여행 가기가 어렵게 됐다. 짧은 여행조차도 당분간은 삼가야 할 상황. 시차가 큰 곳에 가는 해외여행은 더구나 언감생심… 어쩌면 앞으로도 여행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말도 안 되게 줄여야 할 수도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인 여행이 사라지자 이곳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래 방치해둔 건 단지 바빠서만은 아니었다. (지나간 여행을 울궈먹거나 여행에 대한 에세이를 써도 되겠지만, 새로운 여행이 없다면 큰 의미가 있을까) 여행만큼 내 삶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는 취미는 없기에 쓸 이야기가 없었다. 일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고, 인플루언서가 되거나 책을 내고 싶어서 브런치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전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 피아노 연습일지 같은 걸 써보면 어떨까… 최근 음악에 관심이 생겨서 좀 더 공부하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피아노를 치겠다는 생각은 안했는데, 최근 피아노가 갑자기 내 삶으로 들어왔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꽤나 강렬하게. 언제 싫증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당분간 울궈먹을 취미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오래전, 그 시절 중산층 가정이 으레 그렇듯이 엄마는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오빠와 남동생은 피아노를 배우지 않았으니, 어쩌면 여자아이가 갖춰야 할 소양쯤으로 생각한 걸까. 끈기와는 담쌓은 내가 의외로 금방 그만두지는 않았다. 물론 초보단계에서 끝났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소나티네까지 치고 그만둔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 딱히 클래식 음악 팬도 아니고, 한 번도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무슨 조화인지 최근 피아노에 관심이 생겼다. 설날에 아빠 집에 갔다가 거기 놓인 피아노를 뚱땅거려보니, 다 잊어버리긴 했지만 연습하면 불가능하지는 않겠다는 무모한 느낌이 들었다. 기본 연습곡 같은 걸 다시 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클래식이 아닌 곡도 딱히… 그러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쇼팽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고 귀에 익숙한 곡을 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상 쌩초보나 다름없는 내가 과연 쇼팽을 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는 것을 오락으로 삼는 내 성격상, 설사 실패하더라도 큰 즐거움이 될 것 같았다.


집에는 당연히 피아노가 없고, 둘 자리도 없고, 설사 장만한다고 해도 층간소음 유발자가 될거고.. 시간당 대여할 수 있는 피아노방이 생각났다. 홍대 앞에 이런 곳이 몇 군데 있더라. 어제 가서 시작해봤다. 하하 역시 꿈과 현실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사실상 파아노를 쳤다기보다는 손가락이 건반을 헤집고 다닌 것에 가까웠다. 기중 쉬워보이는 Nocturne op.9 no.2를 골랐는데, 유튜브 채널 댓글 보니 나처럼 생각하다가 피봤다는 사람이 여럿 있더라. 시작 부분의 멜로디가 비교적 단순해서 골라본건데, 시, 미, 라를 죄다 플랫으로 쳐야하는 E flat major 곡인데다 이 플랫이 중간에 종종 풀려서(물론 쇼팽이 풀었지) 만만치가 않았다. 게다가 왼손이 단순하고 반복되는 부분들이 많아서 쉬울 줄 알았더니, 이것도 건반들을 두 세 개씩 누르면서 옥타브들을 옮겨다녀야 해서 소리는 나는데 딱딱하기 그지없다. 얼마나 연습해야 부드럽게 들릴까?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서양 남자사람 손 크기를 기준으로 했으니 동양 여자에겐 어려운게 당연하지 라고 생각하면 핑계가 될까? 손가락을 엄청 빨리 움직여서 노래하듯이 쳐야하는 부분들은 아직 엄두도 못내겠다. 심지어 박자가 잘 이해안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뭐 어때? 내가 콩쿠르 나갈 것도 아니고. 정 안되면 맘대로 편곡(?)해서 기본 멜로디만 치지 뭐.


결국 음악을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는거지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아니니까. 지금 와서  수도 없고. 일전에 만났던  작곡가님은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굳이 피아노를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그분은 너무 고퀄을 기준으로 말한  같다.  같은 거의 쌩초보에겐 피아노 건반을 실제로 눌러보는   도움이 되더라. 쇼팽은 이렇게 음의 작은 차이가 이토록 다른 감각을 만들어내는지를 어떻게 알았던 걸까. 피아노에  건반과 검은 건반이 함께 있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했다. 어렸을  아무것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연습하던 때와 다르다. 확실히 나이가 드니까 손가락은 뻣뻣해져도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은  생기는  같다. ‘(si)’ 이토록 아름답고 섬세한 음이란 말인가.


피아노는 누가 발명했는지 모르겠지만 피아노곡은 암튼 쇼팽이 발명한 게 맞다. 쇼팽을 듣고 있으면 피아노가 개별적인 건반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위로 한없이 날아가고 아래로 한없이 내려오는 음들이 날아오르듯이 도약하고 울리면서 피아노의 가능성을 극대화한다. 아주 작은 차이들이 실개천처럼 흐르다가 갑자기 폭포처럼 진폭이 커질 때(이런 구린 표현밖에는 생각이 안나네) 왜 오랫동안 예술의 목적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었는지 이해된다. 여기서 자연은 감각적 형태가 아니라 원리이다. 쇼팽은 그 자체로는 결코 조화롭다고 할 수 없는 청각적 세계를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필연적 질서의 세계로 만든다. 이 질서가 정적인 프레임이 아니라 한없이 유연한 내적 리듬인 한에서.


여러 연주자들의 연주를 골고루 들어봤다. 조성진 등장 이전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루빈슈타인은 솜사탕처럼 감미롭고, 백건우는 물 흐르듯이 유연하고, 호로위츠는 강렬하다. 그런데 난 아직까지 조성진의 쇼팽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놀라움에 필적하는 연주를 들은 적 없다. 다른 연주자들의 곡은 흉내의 흉내의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은데(정말?), 조성진을 들으면 그냥 포기하고 싶어진다. 인간이냐 진짜. 피아노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조성진을 듣지 않는 게 좋겠지만(?), 난 연습자이기 이전에 감상자이므로 오늘도 듣는다.


https://youtu.be/WbcccfyCBl8?si=rsOqIXjYNzogusc0​​

루브르에서 들라크루아가 그린 이 쇼팽의 초상을 처음 본 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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