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dshoes May 17. 2024

피아노는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취미다!

쌩초보의 피아노 연습

무슨 심한 불평인 것처럼 제목을 써놨지만, 그런 건 아니고 작은(어쩌면 상당히 큰?) 진실을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최근   정도 너무X너무X너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밥먹고 잠잘 시간도 줄여야  정도였다. 당연히 피아노 연습에 할애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이렇게까지 바빠지기 , 나는  이렇게 발전을 못할까 싶어 잠시 치기 싫기도 했지만 초보가 욕심이 과하다 싶어 다시 마음을 내려놓았다. 다행히도 피아노 연습은 기본적으로는 항상 재미있었다. 나는 뭔가를 진득이 오래 배우는  지지리도 못하는데 놀랍게도 피아노에는 오래 집중한다. 어째서 이렇게  건지 이유  없지만, 음악은 어느여행을 대체하는 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그러나 피아노 연습은 정말 가성비가 떨어지는 취미이다! 여행을 한동안 안 간다 해도 여행력(?)이 떨어지지 않지만, 피아노는 조금만 안쳐도 급속도로 퇴행한다. 일이 바빠지면서 며칠 동안 건반 구경도 못하고 지나갈 정도로 침체기를 겪었는데, 어쩌다 시간이 나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가 퇴행이 너무 심해서 깜짝 놀란 적이 여러 번이다. 단순히 표현력이 떨어진다 이 수준이 아니라 아예 막 틀린다. 전에는 술술 쳤었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갑자기 손이 고장 난 것처럼 다음 음이 기억 안나기도 한다. 물론 내가 초보라서 이렇겠지만, 피아니스트들도 “하루라도 연습을 안 하면…” 이런 식의 말을 하는 걸 보면 악기 연주란 정말 잠시도 쉴 수 없는 분야인 것 같다(이점에선 가장 비슷한 분야는 스포츠인 듯).


새삼,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이야, 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적 소질을 떠나서라도 난 어차피 체력이 약하고 손이 너무 작아서(손 크기 대비로는 손가락이 길지만 문제는 손의 절대적 크기가 너무 작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했겠지만, 나처럼 인내력이 없고 산만한 인간이 혹시나 음악을 전공했으면 어쩔 뻔했어… 더불어 모든 연주자들에게 새삼 감탄을 보내게 됐고 누군가는 끊임없이 연습을 해서 우리에게 계속 음악을 들려준다는 사실에 난데없이 인류애가 충전되었다(?).


더불어, 피아노 연주란 것이 절대 머리 따로 손따로 노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익숙해진 곡이라고 해도 머리로는 딴생각하면서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치는 음들을 계속 음미하고 어떻게 표현할지 생각해가면서 쳐야 좋은 소리가 나온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렇다고 분석하거나 계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연주 자체가 불가능하겠지. 어디까지나 흐름을 타고 가면서 직관적으로 연주해야 하지만, 단순히 외워서 치는 것이 아니다. 곡의 흐름을 느끼면서, 곡에 최대한 몰입한 상태로 건반을 눌러야 한다.


어쩌면 피아노 연주란, 분석도 기계적 반복도 아닌 그 가운데에서 어떻게 직관적 몰입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창조적 능력을 키우는지 연습하는 수단인 것 같다. 일상의 어떤 영역에서도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있는 듯한 이 미묘한 상태는 경험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피아노 연주는 특별하다. 곡에 녹아들어 흐름을 타고 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줄 놓으면 안 된다. 내가 항상 주도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 하나 내가 깨달은 건, 피아노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체력적으로 지친 날, 심리적으로 위축된 날은 희한하게 잘 안된다. 뿐만 아니라 연습하다 잠시 한눈팔면 귀신같이 미스터치가 나온다.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지치지 않은 상태에서 바른 자세로 쳐야 잘된다. 거꾸로, 피아노 치는 것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등도 좀 꼿꼿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쇼팽 녹턴 9-2라는, 초보에겐 좀 어려운 곡을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평범하게 넘어가기 힘든 부분이 많았고 잘 표현하기가 어려웠기에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고 레슨 영상을 찾아보고 글을 읽어보고 이것저것 시도해보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속도도 표현도 만족스럽게 녹음하고 나면 다음 곡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게 잘 안돼서 짜증도 났다. 그러다 조성진도 연주할 때 미스터치를 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위안이 되었다?(T는 이 대목에서 비교할 걸 해야지 조성진하고 너를 왜 비교하냐고 크게 어이없어했다 ㅋㅋㅋ).


아직 끝까지 한번도 안틀리고 칠 자신이 없어서 앞부분 절반 정도만 녹음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더니, 짧은 시간에 엄청 발전했다 잘친다는 반응이어서 약간 흐뭇했다. 물론 내 수준을 아는 사람들이니 처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진짜 잘친다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그래도 들어줄만 한 정도로는 발전한 건 맞으니 나름 뿌듯했다. 곡이 아름답다는 반응도 있었는데, 난 이 말이 잘친다는 말만큼이나 좋았다. 오 심지어 내가 쳐도 아름답게 들리는구나, 어쨌든 나도 저수준이나마 쇼팽 음악의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구나, 랄까.


6월부터는 조금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 다시 피아노 연습의 빈도를 늘리기로 했다. 하루에 30분만이라도 매일 치는 것이 가끔 한 번에 오래 치는 것보다 나은 것 같다. 한 곡에만 너무 오래 매달려있을 필요 없다는 영상을 봤다. 그 말대로 일단 녹턴 9-2는 나중에 기회되면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다른 곡 연습을 시작했다. 역시 쇼팽, 왈츠 19번이다. 녹턴에 비해서 짧고 간단하고 무엇보다 플랫이나 샾이 없는 A minor 이다! ㅎㅎ 그러면서도 곡은 역시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화음이 정석적이어서 저절로 화성학 공부가 된다. 아 여기서는 이 조합이 오는 게 맞는구나, 란 실감이랄까(변칙이 중간 중간 있는 것 같지만 크게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 덕분에 틀리게 치면 악보 안봐도 대충 틀린 걸 알겠다. 더불어, 이제는 낮은음자리표의 계이름을 전보다는 빨리 읽을 수 있게 돼서 조금 뿌듯하다.


물론 기교적으로 단순한 곡이라고 해서 치기 쉬운 건 절대 아니겠지! 오히려 단순하기에 어떻게 쳐야 하는지 디렉션이 없다는 느낌이다. 자기 색깔을 만들기도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녹턴보다 단순하다는 거지 오른손이 갑자기 두 옥타브를 아르페지오로 도약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거 부드럽게 잘 치려면 꽤나 어려울 것 같다. 난 쇼팽이 이렇게 피아노의 가능한 한 모든 음들을 소환하는 게 너무 좋다. 가장 높은 곳에서, 또 가장 낮은 곳에서, 곡의 예민함은 극치에 달한다. 손가락이 오른쪽 끝 건반들로 달려갈 때, 마치 중력을 극복하듯이 날아오르는 선율이 우리의 감각을 한없이 위로 끌어올리는 느낌이 든다.

21마디에 문제의 도약 부분이 나온다.


녹턴의 경우 처음 연습을 시작할 때는 루바토가 너무 강하지 않고 속도도 빠르지 않은 연주를 선택해서 많이 듣는게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려고 여러 연주를 들어봤다. 멜론에서는 장 이브 티보데(Jean-Yves Thibaudet)의 연주가 적절했는데 유튜브에선 못찾았고 파벨 콜레스니코프(Pavel Kolesnikov)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링크해본다(오른손을 너무 높이 올리는거 나만 거슬리나…그래도 소리가 청아하다. 비록 내가 늘어지는? 연주를 크게 좋아하진 않지만).


https://youtu.be/qHeJlSWSnUI?si=UNwBCbXup8D6YbL8


다음은, 루바토가 많고 강약 변화가 심해서 초보가 따라하기엔 안좋지만 어쨌든 훌륭한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연주. 루바토는 자유이지만 또 질서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질서, 그것이 리듬 아닐까. 리듬이야말로 음악의 생명이라는 걸 피아노 연습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 같다.


https://youtu.be/n-voZrgjUVc?si=nuB6G3WIkAWaCEqF



덧 : 음악 듣기 레파토리도 많이 확장되고 있다. 최근엔 느닷없이 베토벤에 빠져들고 있다. 교향곡, 현악 사중주, 피아노 소나타… 여러 장르들을 듣는다. 옛날엔 베토벤이 이렇게 좋다는 걸 왜 잘 몰랐을까. 음악이 감각적 아름다움 그 이상의 무엇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곡들은 알려준다. 쇼팽의 곡들이 중력을 거부하고 날아오른다면, 베토벤의 곡들은 생각 없이 루틴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멈춰세우는 것 같다. 여기를 보라고! 하면서. 하지만 돌아보면 순간 음들이 다시 휙 사라지고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쉼표가 음표만큼이나 큰 존재감을 갖기에, 노래하는 선율은 필요하지 않다. 베토벤의 음악은 매끄러움을 거부하면서 더 깊고 큰 질서를 만들어낸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칠 수 있다면 많이 기쁠 것 같다! 왈츠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조금씩 연습해봐야지.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한없이 발전할 수는 없을테고 내가 칠 수 있는 곡의 난이도가 정해져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음의 채도를 높이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