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먼 곳으로, 현들의 여행 : 베토벤 현악 4중주 16번

나의 플레이리스트

by redshoes

“어렵게 굳힌 결심”.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4악장 악보에 적힌 너무나 유명한 이 문구들과 베토벤 최후의 작품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무겁고 비장할 것 같은 선입견과 달리, 이 곡은 뜻밖에도 가볍고 익살스럽기까지 한 분위기로 시작된다. 많은 해석자들이 말하듯이 베토벤이 생애 마지막에 도달한 어떤 초월, 내려놓음의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는 왠지 현악기들이 떠나는, 결국은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어떤 여행의 시작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암울한 미래를 전혀 예감하지 못할 정도로 천진난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볍게 준비하는 여행길 같은 1악장에 이어 2악장은 조금 날카로워졌지만 여전히 경쾌함이 있는 비바체로 진행된다. 그러나 여행은 3악장에 와서 급격히 어두워진다. 짧은 음형들이 춤추는 것 같았던 앞의 두 악장과 달리 호흡이 길어지며 낮게 가라앉는다. 약간은 안정적으로 출발했다가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노래한다고 부르기도 어려운 현들의 날카로운 마찰이 되풀이되는 4악장은 질문과 대답이라기엔 너무 생경해서 말이 아니라 비명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말처럼 비명이나 울음이야말로 현대인이 잃어버린 원초적인 언어라면, 악기들은 대화하고 있는 것이 맞다. 바이올린이 주선율을 담당하고 비올라와 첼로가 베이스를 담당하는 전통적인 형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네 명의 캐릭터가 무대 위에서 부조리극을 공연하는 것 같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익살스러운 1악장에서 비명 지르는 4악장까지의 전개가 듣는 사람이 미처 예상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펼쳐진다는 것이다. 전체 길이가 짧고 악장 사이에 쉼이 없기도 하지만, 악장마다 분위기가 이렇게 다른데 급격한 단절이나 병렬적 나열 같은 느낌이 없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분위기가 조금씩 변해서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4악장의 한가운데에 휘말리게 된다. 악장마다 분위기와 템포가 다른데 어떻게 이렇게 이어지면서 흐르는 느낌이 생기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베토벤의 능력이겠지. 여행은 이미 파국을 맞았고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지만, 놀랍게도 어떤 면에서는 출발의 느낌이 다시 발견된다.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떠나는 새로운 여정이다. 음악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예전엔 현악 4중주는 내게 친숙한 장르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현악기들은 피아노에 비해 낯설고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이 있었다. 또 2대밖에 안 되는 바이올린들은 오케스트라 안에서 무리지어 연주할 때보다 깊은 울림이 잘 나지 않는다는 편견이 있었고, 무엇보다 현악기 특유의 떨리는 음들이 정박할 곳 없는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토벤의 현악 4중주를 들으면서 이 장르가 4개의 악기가 각자의 성격으로 말을 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비한 매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현악기들의 소리가 불안정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건 피아노보다 현악기들이 훨씬 더 배음이 많기 때문임을 이젠 안다. 그리고 이것이 현악기의 매력이라는 것도. 허공에서 시작해서 허공에서 끝나는 음들. 안정적인 토대가 없는 현의 진동들이 만들어내는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공간. 벽도 바닥도 없는, 고정된 좌표를 갖지 않고 항상 움직이는 어떤 세계. 베토벤의 후기 현악 사중주들은 이 세계를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창조한다.


- 지난 7월 부산 콘서트홀에서 노부스 콰르텟의 베토벤 현악 4중주 전곡 연주 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가 들으러 갔던 날 연주했던 곡이 6번, 16번, 15번이었다. 연주가 끝날 때 제1 바이올린 주자가 높이 활을 올렸다 내렸는데, 그 순간 악기연주도 일종의 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항해가 시작될 때까지, 정박점 없는 음의 흐름을 잠시 정지시키는 몸짓.



https://youtu.be/q6TPkb-U-xU?si=Vb2_hFT5ATKbAZ_u

Alban Berg String Quartet이 연주하는 베토벤 현악 4중주 16번. op.135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없이 심장박동에 가까운 울림들 : 브람스 교향곡 4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