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플레이리스트
다른 예술장르, 예컨대 미술과 비교했을 때 음악의 특이함 중의 하나는 '원인과 결과의 분리'라는 생각을 한다. 작곡가의 악보는 수학적 엄밀함과 정교함을 지녀야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곡의 구조를 전혀 몰라도 감상에 지장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음악은 감정에 직접 작용하는 힘을 가장 강하게 지니는 장르다.
브람스 교향곡 4번에 대해 흔히 '이성과 감성의 조화'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이 곡은 음악의 이러한 특성을 가장 완성된 방식으로 들려주는 곡이 아닐까. 이 곡에는 중세의 교회선법에서 바로크의 파사칼리아, 고전주의의 소나타 형식까지 서양 음악사를 관통하는 음악 형식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 곡은 전혀 분석을 요하지 않는다. 우울하고 엄숙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들려주는 아름다운 곡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도 그냥 듣기만 해도 되지만, 왠지 자꾸 구조를 공부하고 싶은 것은 T의 숙명일까. ㅎㅎ
쇼팽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음들을 띄워 보낸다면, 브람스는 가장 낮은 곳으로 음들을 내려보낸다. 브람스의 곡은 극단의 지점으로 좀처럼 올라가지 않으며 심한 도약도 사용하지 않는다. 마치 생명의 토대면서도 항상 의식되는 것이 아닌 심장박동처럼, 조금씩 쌓여가는 화음과 선율의 힘이 묵직한 울림으로 서서히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다. 불안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엔가 전체를 몰락시키는 어떤 파국의 감성이 브람스에게는 있다.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항상 베토벤의 그림자에 시달렸다는 브람스가 이 4번 교향곡에서 마침내 베토벤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는데, 사실 그전 교향곡도 내가 듣기에는 딱히 베토벤스럽지 않다. 물론 선율적 동기를 건축물처럼 쌓아서 곡의 구조를 만드는 방식, 모든 악장들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구성하려는 경향은 분명 베토벤적이지만, 베토벤에게는 이토록 깊은 우울이 없으니까. 베토벤의 곡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신체적 병을 디폴트로 깔고도 기본적으로 활기가 있다. 가장 침울한 지점에서도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며 약동하는 그런 감성을 브람스에게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누가 더 좋은가 묻는다면…도저히 선택할 수 없다는 답을 할 수 밖에. 베토벤은 경이롭고, 브람스는 감동적이다.
교향곡 4번은 1악장부터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다. 3도 하행, 3도 상행의 반복으로 시작하는 선율이 묵직하면서도 애절하게 시작되어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악장 전체를 관통한다. 윤한결 지휘자의 글이 설명해주듯이*, 이 3도라는 음정은 악장을 지탱하는 구조적 장치로 작용한다. 제시부에서 전개부로 이동할 때도 일반적인 소나타 형식의 5도 아니라 3도로 조바꿈한다. 당대의 주류 낭만주의 음악처럼 구조를 이탈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구조 그 자체의 효과를 추구하는 이런 점 때문에 브람스 음악은 '보수적'이라는 수식어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벨의 경우도 그렇듯이, 전통적 형식을 차용하는 것이 반드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란, 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선형적인 것이 아닐 수 있으니까. 미래는 항상 '이미 - 인 시간'의 도래이며 그런 의미에서 반복이라고 하이데거도 말하지 않았나. 하이데거가 옳다면, 과거의 주름 없는 미래는 없다.
어딘가 이국적이고 신비한(현대의 장단음계와 다른 교회선법적 성격 때문이라고 한다) 2악장을 거쳐 가장 활기찬 3악장 스케르초가 이어진다. 4악장은 곡 전체를 종합하면서 가장 묵직한 울림을 가져다준다. 4악장에 대한 일반적 설명은 바흐의 칸타타 BWV 150의 7번째 곡에 사용된 파사칼리아(짧은 베이스 선율을 낮은 성부에서부터 조금씩 쌓아서 위로 올라가는 기법)를 차용했다는 것이다. 8 마디의 베이스 선율이 30번 반복된다(내가 세 본 것은 아니고 검색이 카더라..). 그런데 바흐의 칸타타를 들어봐도 감각적으로는 딱히 유사하지 않다. 어쨌거나 이 점에서 브람스는 과거를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울림, 두께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겠지. 파사칼리아가 춤곡이라는 것도 기묘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느리고 우울하고 장엄한 춤곡이 있나? 현대의 감각으로는 (아마도 19세기의 감각으로도) 그 자체가 낯설기 때문에 4악장이 이토록 매혹적인지도 모른다.
https://in.arte.co.kr/music/theme/4150129/list
* 브람스 4개의 교향곡에 대한 윤한결 지휘자의 글.
음악을 많이 들을수록, 연주에 50퍼센트의 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50퍼센트 안에는 지휘자의 능력도 들어 있고. 지금까지 들었던 브람스 4번 교향곡 연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은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한 1992년 버전이다. 아바도의 지휘는 강약과 리듬의 호흡을 잘 조절하여 음악을 숨 쉬게 만든다.
Brahms: Symphony No. 4 in E Minor, Op. 98: IV. Allegro energico e passionato - YouTube
4악장 연주 음원. 같은 채널에서 나머지 악장들도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