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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hoes Jan 01. 2021

낙소스 섬의 평화

그리스

(여행시기 : 2018.7)


에게해의 섬 낙소스(Naxos)에서, 우리는 ‘섬에서의 휴양’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이상적인 고요함을 발견했다.


어쩐지 북아프리카를 연상시키는 흙벽과 흰 벽의 조화, 약간 낡은 골목들과 갈색의 성채, 아폴론 신전이 있는 항구 옆의 작은 섬. 바닷가의 적당히 한적한 식당에서 내가 즐겨 마시던 작은 사이즈의 탄산음료 룩스(Loux)(라고 발음하는 게 맞을까?)를 앞에 놓고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곳곳에 붉은색의 꽃들이 피어있는 건 미코노스와 비슷했지만 낙소스의 꽃들은 좀 더 소박하고 무심한 느낌이었다. 아 정말 이곳은 한 달쯤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은 곳이었다!



낙소스의 올드타운은 소박하고 조용했다. 그리고 미코노스보다 나무도 그늘도 더 많았다. 남쪽으로 더 내려와선가 여름이 짙어져선가, 태양은 타는 듯 뜨거웠지만, 그늘로 들어가면 시원하고 바람이 잘 불었다. 이 바람 때문에 에어컨이 그립지 않았다.


산토리니의 엄청난 풍광은 감탄을 자아냈고 미코노스에서는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이 두 섬은 성수기의 유명 관광지답게 무척 북적거렸다. 물론 이 북적거리는 명랑한 분위기가 여름 여행의 최대 묘미이며 장점이기도 하지만, 낙소스섬로 떠났던 당일치기 여행은 잠시 또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 고요한 휴식을 선사했다. 여긴 사람이 별로 없고 고양이들만 돌아다닌다. 미코노스에 많던 명품샵이나 클럽도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때묻은 흰 벽들은 완벽한 화이트보다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낙소스는 미코노스에서 페리로 1시간 50분쯤 떨어져 있었다. 페리에서 본 첫인상은 비옥하다기보다는 반사막 같은 흙 언덕 위에 흰 집들이 흩어진 모양이었다. 터키에 가까운 사모스섬만 해도 푸르른 곳이었는데, 에게해의 중심부에 오니 풍경이 정말로 ‘이국적’이다. 땅이 메말라보여서 바다의 짙푸름이 더 선명하다.


그리스 섬들의 예쁘장한 아름다움은 잘 알려져 있지만, 황량한 아름다움은 덜 유명한 것 같다고 T와 이야기했다. 우리가 본 그리스의 자연은 한국식으로 녹음이 우거지고 숲이 많은 곳은 아니었다. 산토리니에 도착했을 때도 예멘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가본 적 없습니다. 사진만 보고 하는 말 ㅎㅎ). 그런데 섬에 내려 골목을 걸어 들어가면 점점 더 아름답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색채가 너무 선명해서일까. 어쩌면 단지 지중해성 기후와 자연의 특성이 동아시아에서 온 여행객에게 낯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도 분명 농작물이 안나는 것은 아니니까. 낙소스만 해도 포도밭이 많아서 질 좋은 와인을 많이 생산한다고 한다.



베네치아인들이 지었다는 성채를 찾아서 섬 위를 올라가다가 어떤 소박한 건물에서 컨퍼런스가 열리는 것을 보았다. 이 건물은 옛 학교 건물이고 컨퍼런스의 제목은 “European Forum on Clean Energy for Islands”였다. 낙소스에 잘 어울리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실내에서 딱딱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바깥이 너무 좋다는 게 문제점(?)이긴 할 듯..


그리스의 섬들은 사람을 바깥으로, 자연 속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어쩐지 누구나 밝고 외향적이고 느긋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혹시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된다면, 커피와 과자로 연명하는 창백한 도시인인 나도 적당히 탄 얼굴로 맨발에 밀짚모자를 쓰고 하늘과 바다와 노을을 벗 삼아 살 수 있을까? 아니면 곧 지겹다며 뛰쳐나가게 될까? 어쩐지 후자에 가까울 것 같긴 하지만, 에게해의 섬들, 특히 낙소스는 적어도 평화와 고요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가 되었다. 어쩌면 그걸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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