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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hoes Nov 24. 2021

자그레브의 추억

크로아티아

(여행시기 : 2017.2)


비행기가 프레데릭 쇼팽 공항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오자 기내에 쇼팽의 곡이 울려 퍼진다. 숱한 공항 이름이 있지만 이렇게 근사한 이름은 드물거라고 감탄하는 사이, 비행기는 경유지인 바르샤바를 떠나 다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날아간다. 한밤중에 도착해서  숙소인 팰러스 호텔로 직행,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호텔은 우아한 옛 건물들로 둘러싸인 올드 시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G 작가가 소개해준 호텔 중에 가장 고급을 골랐는데도 10만 원 안팎. 그런데 모든 것이 고급스럽고 고풍스럽다.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면서 잠시 바깥에 나가보니, 자그레브는 온통 안개에 싸여 있었다. 겨울이었는데도 공기는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온화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다와다 요코는 <용의자의 야간열차>에서 기차가 이탈리아에서 유고로 넘어갈 때 퀴퀴한 슬라브의 냄새가 난다고 썼는데, 내가 본 자그레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어서, 이 간극은 뭘까 잠시 생각해봤다. 다와다 요코가 했던 기차여행은 오래 전의 일이니 그 사이에 이곳이 바뀌었거나 각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어떤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겠지. 어쩌면 이탈리아에서 기차를 타고 온다면 자그레브는 슬라브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본 자그레브는 오히려 동유럽이라기보다는 남유럽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온화한 날씨, 거리의 종려나무들, 오렌지빛 지붕들, 시장에 팔고 있는 싱싱한 과일들. 하긴 넓지 않은 바다를 건너면 바로 이탈리아니까(이 사실도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음식이나 문화에 이탈리아의 영향이 꽤 많다고 한다.


자그레브의 아름다운 호텔, 호텔 팰러스.


옛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고 티브이 예능 덕에 한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정도 말고는 크로아티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유고 연방의 해체 이후 일어났던 전쟁과 학살의 역사가 내가 가장 강하게 기억하는 발칸반도의 이미지인데, 자그레브는 밝고 화려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투박하거나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섬세한 곡선을 지닌 옛 건물들, 밝은 느낌의 노천 시장과 광장이 있었다. 보행자 친화적인 길들은 한밤중에도 을씨년스럽지 않고 사람들이 많았다. 하긴 외국인들도 서울에 와서 “전쟁 이후 폐허가 된 것만 알았는데 이렇게 번쩍거릴 줄이야..” 뭐 이러지 않는가. 여행자는 이처럼 피상적이다. 하지만 사라진 것 같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G 작가의 작업실에는, 작업 속에는 그것이 있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모종의 기획일 때문. 도착 다음날, 점심을 먹으면서 G 작가에게 자그레브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더니, 갑자기 왜 혼자 점심을 먹냐면서 당장 식당에 오겠다는 게 아닌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예정된 약속시간에 만나자고 했는데, 그 이후로 내가 떠나는 날까지 3일 동안 G 작가는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친절을 베풀었다. 먼 곳에서 온 손님을 혼자 둘 수 없다는 느낌의, 무척 동양적인(?) 환대여서 서유럽 사람들의 개인주의에 익숙했던 나는 한편으로 당황스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즐거웠다. 덕분에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가보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으니.. 심지어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비공개 퍼포먼스에도 참여했다!


G 작가의 이런 환대가 개인적인 스타일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크로아티아를 여행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나라 사람들의 친절함에 대해 비슷하게 공통된 이야기를 들었다. 집단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상당히 꺼리는 나에게도, 국민성이라는 단어가 영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이 여행. 자그레브에서의 이 따뜻한 환대 덕에 크로아티아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본격적으로 이 나라를 여행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이 계획은 허무하게 무산되었지만, 옥빛으로 빛나는 아드리아해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그래 언젠가는, 하고 중얼거린다. 자그레브, 두브로브니크, 스플리트, 자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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