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dshoes Jul 25. 2022

피렌체, 밤의 아르노강

유럽여행

(여행시기 : 2022.7)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이 (로마일 수도 있었을 텐데) 피렌체인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소설의 차분하고 가라앉은 정서에는 확실히 피렌체가 더 어울린다. 여전히 너무나 화려하고 장중한 로마와 달리, “복원의 손길이 따라잡을 수 없이 낡아가는” 피렌체의 갈색 골목길에는 알 수 없는 처연함이 있다. 2천 년 전부터 수많은 시대의 문화가 케이크처럼 켜켜이 쌓인 로마에 비해, 르네상스라는 특정 시대에 한 순간 찬란하게 피어났던 도시여서일까.


각 공국의 상징을 봐도 베네치아의 사자, 로마의 늑대에 비해 피렌체는 ‘꽃’이다. 흔히 그냥 ‘두오모’라고 부르는 대성당의 본래 이름도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라고 한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도시 곳곳의 꽃문양이 인상적이어서 잘 기억하고 있다.



두오모 근처와 미켈란젤로 광장의 엄청난 인파, 두오모 코폴라나 조토의 종탑, 우피치 미술관의 치열한 예약 경쟁은 이 도시도 혼잡한 최상급 관광지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피렌체를 조용한 도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해질녘 미켈란젤로 광장에 올라갔다가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지름길로 걸어 내려오면서 우연히 내가 7년 전 묵었던 아르노 강가의 B&B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 근처가 피렌체에서 가장 고요하고 평온한 곳 중 하나였던 것이다!


같은 아르노강이라도 우피치 미술관 인근과 베키오 다리 근처는 사람이 무척 많고 도회적인데 비해, 숙소 근처는 한적하고 넓었다.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가 있었고, 강 너머로 멀리 두오모와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보였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평소 기억력이 희박한 내가 오래전 숙소를 기억해내고 “여기야 여기!”라고 하자 T는 놀랐다. 이번에 같은 곳을 예약하지 않은 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위치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기차역에서 좀 떨어져 있어서 이동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좋았던 숙소였다. 호텔이 아니라 가정집을 B&B로 만든 곳이었는데, 마치 현지인의 집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갈색 현관과 노란색 외벽이 따스했고, 자갈이 깔린 작은 정원에는 나무로 만든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다(이번엔 테이블은 없고 그 자리에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1층에 있던 방은 천장이 높았고 수도사의 방처럼 벽이 희고 장식이 없었다.


가까이 가서 간판을 확인하고 호텔 앱에 들어가보니 아직 B&B로 운영하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건, 벽에 그림과 장식이 걸리고 흰 침구 대신 색깔있는 이불이 덮인 방 사진이 올라 있었던 것(난 수도사의 방 같은 곳을 더 좋아한다). 주인이 바뀐 걸까?



내가 노상 하는 공상대로, 이 B&B를 우리가 사자! 하고 T에게 말했다. 이런 헛소리를 하고 있으면 즐겁다. 세계 곳곳에 우리의 별장 수는 늘어간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강변에서는 불빛이 보였고 사람들이 흥겹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스러운 베로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