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여행시기 : 2022.7)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이 (로마일 수도 있었을 텐데) 피렌체인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소설의 차분하고 가라앉은 정서에는 확실히 피렌체가 더 어울린다. 여전히 너무나 화려하고 장중한 로마와 달리, “복원의 손길이 따라잡을 수 없이 낡아가는” 피렌체의 갈색 골목길에는 알 수 없는 처연함이 있다. 2천 년 전부터 수많은 시대의 문화가 케이크처럼 켜켜이 쌓인 로마에 비해, 르네상스라는 특정 시대에 한 순간 찬란하게 피어났던 도시여서일까.
각 공국의 상징을 봐도 베네치아의 사자, 로마의 늑대에 비해 피렌체는 ‘꽃’이다. 흔히 그냥 ‘두오모’라고 부르는 대성당의 본래 이름도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라고 한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도시 곳곳의 꽃문양이 인상적이어서 잘 기억하고 있다.
두오모 근처와 미켈란젤로 광장의 엄청난 인파, 두오모 코폴라나 조토의 종탑, 우피치 미술관의 치열한 예약 경쟁은 이 도시도 혼잡한 최상급 관광지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피렌체를 조용한 도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해질녘 미켈란젤로 광장에 올라갔다가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지름길로 걸어 내려오면서 우연히 내가 7년 전 묵었던 아르노 강가의 B&B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 근처가 피렌체에서 가장 고요하고 평온한 곳 중 하나였던 것이다!
같은 아르노강이라도 우피치 미술관 인근과 베키오 다리 근처는 사람이 무척 많고 도회적인데 비해, 숙소 근처는 한적하고 넓었다.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가 있었고, 강 너머로 멀리 두오모와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보였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평소 기억력이 희박한 내가 오래전 숙소를 기억해내고 “여기야 여기!”라고 하자 T는 놀랐다. 이번에 같은 곳을 예약하지 않은 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위치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기차역에서 좀 떨어져 있어서 이동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좋았던 숙소였다. 호텔이 아니라 가정집을 B&B로 만든 곳이었는데, 마치 현지인의 집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갈색 현관과 노란색 외벽이 따스했고, 자갈이 깔린 작은 정원에는 나무로 만든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다(이번엔 테이블은 없고 그 자리에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1층에 있던 방은 천장이 높았고 수도사의 방처럼 벽이 희고 장식이 없었다.
가까이 가서 간판을 확인하고 호텔 앱에 들어가보니 아직 B&B로 운영하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건, 벽에 그림과 장식이 걸리고 흰 침구 대신 색깔있는 이불이 덮인 방 사진이 올라 있었던 것(난 수도사의 방 같은 곳을 더 좋아한다). 주인이 바뀐 걸까?
내가 노상 하는 공상대로, 이 B&B를 우리가 사자! 하고 T에게 말했다. 이런 헛소리를 하고 있으면 즐겁다. 세계 곳곳에 우리의 별장 수는 늘어간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강변에서는 불빛이 보였고 사람들이 흥겹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