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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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어지는 이야기.
피곤에 지쳐 정신없이 잠에 빠졌던 우리는 다음날 아침, 호텔 주인이 말해준 자동차 정비소로 차를 몰았다. 앞 범퍼가 우그러지고 전조등과 에어컨이 나간 차를 수리하기 위해서였다. 어젯밤, 현대차 정비소가 혹 있냐고 물어보면서도 황량한 와이오밍의 작은 마을에 과연? 싶었는데 뜻밖에도 호텔 주인이 자신 있게 있다고 답하는 게 아닌가. 옆에 있던 호텔 직원 역시 끄덕끄덕거렸다. 다행이다. 금방 차 고치고 다시 떠나자, 하고 달려간 정비소에서 우리는 간판에 적힌 ‘혼다’라는 글자를 보고 급좌절했다. 하하하 현대, 혼다..
이젠 어쩐다? 어쨌든 엔진엔 문제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예정대로 유타의 솔트 레이크 시티로 떠날까? 내가 우리의 이 계획을 정비소 사장님에게 말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강하게 고개를 가로짓는다. 위험하다는 것이다. 솔트 레이크 시티까지 9시간은 걸린다, 가는 동안 내내 사막이다. 에어컨도 전조등도 없이 가면 절대 안된다. 더구나 차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어제 두 대의 차 운전자들이 보여줬던 험지 거주자들끼리의 동지애를 사장님의 진지한 태도에서 다시 한번 느꼈다. 대평원과 사막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이 만류를 약간 과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제 중서부-서부 여행의 위험에 대해 안다. 자연이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여기선 겸손함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그러면 유타는? 솔트 레이크 시티는? 장구한 우리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데. T의 지인이 살고 있어서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날 수 있는 곳인데. 게다가 유타에는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한 장소가 있었다. 그것은 대지미술가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의 <나선형 방파제(Spiral Jetty)>. 솔트 레이크의 로젤 포인트라는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는 이 작품에 가보는 것만으로도 유타 여행의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갈 수 없게 되었네. 잠시 우울했지만, 뭐, 어떤 건 상상 속에 그대로 놓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오랫동안 물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이 작품은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으로 유명하니까. 마거릿 아이버슨의 표현처럼 ‘삼중의 비가시성’을 가진 이 작품은 과연 나의 시야에서도 이렇게 멀어지는구나. 작품에 어울리는 퇴장(?)이다.
https://youtu.be/vrbNsHs7ptE
유타는 깔끔하게 포기했지만, 차는 어디서 고치나? 정비소 사장님이 또 한 번 도움을 주었다. 2시간 정도 가면 콜로라도의 덴버가 나오는데 거긴 대도시고 한국인도 많으니 현대 정비소가 있을 거라는 것. 듣던 중 솔깃한 소리다. 2시간이면 미국 기준으로 코앞. 우린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기치 않게 이 여행의 힐링 장소가 되어준 덴버! 지금도 덴버를 기억하면 푸근한 느낌이 먼저 든다. 안전하고 깨끗했고, 현대차 정비소도 있었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텔도 있었고, 한국 음식점들도 여러 군데 있었다(특히 덴버 근교의 오로라에).
콜로라도는 서부의 오아시스였다. 고지대라 덥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푸르름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동부의 자연에 비하면 여전히 기가 세고 거칠다고 해야겠지만, 훨씬 더 황량한 곳에 있다와서인지, 산과 나무, 풀이 우거진 풍경은 지친 우리에게 휴식의 시간을 주었다.
멀리 만년설을 얹은 산이 보이던 덴버 시내는 널찍널찍하고 깔끔한 분위기였고, 공공 조각 작품들이 많았다. 덴버에서 멀지 않은 대학 도시 볼더는 마치 동부처럼 아기자기한 곳이었다.
부품 교체에 무려 일주일이 걸린다는 진단을 받은 후, 우리는 작은 차를 렌트해서 더 남쪽으로, 뉴멕시코의 산타페로 갔고 거기서 한동안 게으른 체류자 생활을 했다.
- 사실 덴버 근교의 오로라에선 우리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끔찍한 사건이 났었다. 영화관에 들이닥친 괴한이 최루탄을 쏘며 총을 난사해서 12명이 죽고 58명이 다친 사건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마음이 어둡기도 했지만, 탈진한 우리는 일단 생각을 멈추고 쉬는 것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