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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hoes Aug 21. 2022

이토록 완전한 암흑

미국여행

며칠째 대평원(Great Plains)을 달리던 우리는 그날 와이오밍의 래러미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해서 쉬기 위해 조금 서두르고 있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향하고 있었고, 운전대를 잡은 T는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 대신 지름길로 보이는 국도(US route)를 택했다. 이것이 실수였음을 그때는 몰랐지. 야생동물이 활동하는 밤이었고, 동물들이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철망을 쳐놓은 고속도로와 달리 국도에는 아무런 방어벽이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무언가 차 앞으로 확 뛰어들어와 충돌을 피하려고 T는 핸들을 꺾었고, 둔탁한 진동과 함께 차는 멈추었다. 순간 차의 전조등이 꺼졌다.


동물이 불쌍하게 되었지만 운전의 달인 T도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 나중에 들으니 이럴 때 핸들을 너무 급격히 꺾다가 차가 전복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


엔진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 차에 부딪힌 그 무엇은 보이지 않았다. 실은 근처에 있었다 해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가로등은 물론이지만 지나가는 차 한 대도 없다. 인가가 전혀 없는 대평원의 한복판이고 한밤중이다. 하필 그믐이어서 달빛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T가 시동을 다시 켰지만 전조등은 들어오지 않았다. 차 안의 실내등도 작동하지 않았다. 당시 (10년 전이다) 우리가 쓰던 아이폰에는 토치 기능 같은 것도 없었다. 다행히 엔진은 정상적이어서, T는 깜깜한 와중에 약간씩 핸들을 돌려 차를 길 가장자리로 옮겼다.


차 밖으로 나온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다. 이건 꿈인가…? 아까는 경황이 없었는데 문득 사방을 둘러보니…아니 ‘둘러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보이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하는 문제를 넘어선 상황이었다. 차의 전조등은 미약하기 그지없는 빛 같지만, 그것이 세상을 밤에서 구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조등이 사라지자 그 어디에도 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멀리 가물거리는 밝음의 기미 같은 것도 없었다. 암흑. 그야말로 완전한 암흑이었다. 이렇게 절대적인 어둠과 맞닥뜨린 것은 내 평생 처음이었다.


단지 사물을 구별할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공간 자체가 증발해버린 느낌이었다. 시공간이 뒤틀려서 이 광활한 땅을 삼켜버린 것 같다. 아니 전조등이라는 이물질(?)이 사라지자 대평원이 본모습으로 돌아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날 찍은 사진 아님. 전조등이 있으면 이렇게 보인다는 예시임.


거대한 자연의 침묵 아래 현실감각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이 광활한 공간에서는 사실 낮에도 그런 느낌이었지만, 암흑이 모든 것을 지배하자 우리라는 작은 존재는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흔적으로 축소되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어둠의 밀도는 약해졌을 것 같지만(별빛도 있고 그믐이지만 달도 있긴 있었으니) 기억나는 건 완전한 암흑 밖에 없는 걸 보니 그 감각이 너무 강렬했던 것 같다.


밤의 대평원은 내게 대자연의 냉엄함과 강력한 힘을 처음으로 깊이 실감하게 만들었다. 이 날을 돌이켜볼 때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경외감 같은 것이었다. 물론 결국은 무사히 일이 수습이 되었으니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행히 3G는 작동하고 있었다. roadside assistance에 전화해서 견인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곁을 지나간 차는 딱 두 대였다. 두 대 모두, 멈춰서서 우리에게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물었고, 우리가 괜찮다고 말한 후에도 정말 괜찮냐고 다시 물은 뒤 떠났다. 험준한 곳을 지나는 여행자들끼리의 동지애 같은 것이 느껴졌다.


견인차는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전에 다른 이유로 차가 고장났을 때 견인차가 올 때까지 한나절 걸렸던 걸 감안해서 밤샐 각오를 했는데. 담력이 커지고 인내심이 느는 것이 미국살이의 이득(?)인 것일까.


아무런 지표가 없으니 도로 이름과 대략의 위치만 말할 수 있었는데 견인차는 우리를 어떻게 찾은 걸까. 생각해보니 길이 한 길이니 그저 주욱 달려왔던 것 같다. 잘 찾아와줘서 고마웠다. 래러미까지 견인 트럭 위에 실려서 이동했다. 예약해둔 작은 호텔 주인을 새벽에 고생시키며 체크인을 마친 우리는 내일 차 수리를 하고 예정대로 길을 떠나리라 기대하면서 정신없이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아직 모르는 채.


사우스 다코타의 대평원.
우리가 묵었던 호텔 앞 풍경 - 래러미, 와이오밍. 이 정도면 초문명지대임.


(여행시기 : 2012.7)


- (2023.5.12 덧붙임) 이 이야기를 미국에 오래 살았던 친구에게 했을 때, 견인차가 온 것 자체가 큰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 여행 때만해도 미국에 대해 잘 몰라서 견인차가 ‘안올 경우’는 생각을 못했는데, 그 후 여러 일을 겪고난터라 친구의 이 말이 충분히 이해갔다. 전화를 안받고, 메일이나 음성 메시지에 답이 없고, 우편물이 안오고… 이런게 미국에선 너무 흔한 일이라서… 그래도 어쩐지 ‘험지의 동지애’가 있는 지역이니 견인차가 안오지는 않았을거라는 느낌이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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