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끝없이 뻗은 광막한 고속도로변 주유소에서 시린 손을 비비며 기름을 넣는다. 노즐의 차가운 감촉만큼이나 봄은 멀리 있다. 몇백 마일을 더 달려야 오늘을 마감하고 쉴 수 있을까 계산해 본다. 먼지 섞인 바람, 바탕색을 알아보기 힘들게 더러워진 차들, 야구모자와 후드티를 입고 차가운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들.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인디애나, 더러는 위스콘신, 앨라배마 혹은 텍사스 번호판을 단 차들. 자연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가공된, 인간적 세계라고 부르기엔 너무 살풍경한, 거칠고 흐린 풍경들.
계량적으로 측정되는 ‘공간이동’의 개념이 여행의 개념을 진정으로 대체하게 되는 곳 - 그곳이 바로 미국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달린다. 이동한다. 이 땅은 너무나 넓어서, 그 외의 개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작고 섬세한 것들은 길 속에 사라진다.
위 글은 뉴욕주에서 오하이오주까지 차를 몰고 갔을 때 쓴 메모이다.
가본 적 없는 곳에서 데자뷔를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 시공간의 한계에 묶여있지 않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길 위에서 나는 종종 영화 속 장면을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코헨 형제, 테렌스 멜릭, 데이빗 린치의 세계가 거기 있었다. 이를테면 데이빗 린치의 “Lost Highway”. 이 영화는 린치의 작품 중 가장 호러에 가깝고 가장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풍긴다. 끝없는 어둠 속을 달리는 차 앞에는 설명 불가능한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밤이 깊어질수록, ‘나’라고 알려진 것은 사라진다. 시간과 공간이 아무리 낯설게 달라져도, 자아가 유지된다면 세상은 그렇게까지 공포스럽지 않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애초에 미국의 고속도로처럼 낭만적이지 않은 장소에 아우리와 미스터리를 부여하는 예술가들은 대단하다. 유럽처럼 오래된 성이나 안개 낀 숲, 옛 전설 같은 재료도 없이. 어린 시절의 로망을 만들었던 건 분명 유럽의 예술이지만, 뒤늦게 경험한 미국의 자연과 문화는 낭만 아닌 낭만, 서정 아닌 서정이라는 ‘우리 시대의 아우라’를 미국의 예술가들이 만들었음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훨씬 더 거칠고 삭막한 세계, 위험과 가까이 있는 건조한 매혹의 세계다. 여기서 죽음은 유럽적 예술보다 훨씬 더 사실적으로, ‘범죄’의 라벨을 달고 다가온다.
“Lost Highway”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데이빗 보위의 I’m Deranged가 너무 잘 어울린다. 이 장면을 뒤늦게 다시 보면서, 내가 경험한 밤의 미국 고속도로와 너무 똑같아서 놀랐다. 말 그대로 리얼리즘이다. 노란 중앙선을 밟으면서 달리는 게 이상하긴 한데, 이 영화의 ‘죽음충동’을 생각해 보면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