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좋아한다. 극장가기 싫어하는 내가 이분 영화는 거의 다 영화관에서 본 정도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술영화’인 것보다 상업영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거기에 자기 색깔을 입히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겠지. 그런 점에서 놀란 감독은 독보적이다. 지금은 <덩케르크>가 내 최애영화지만, 당시 나왔던 영화 중에는 <다크 나이트(Dark Knight)>를 가장 좋아했다. 영화의 주 촬영지였다는 시카고에 그전부터도 가보고 싶었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 많은 사람들은 놀란 감독이 팀 버튼의 화려한 판타지 <배트맨>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지 우려 + 기대했었는데, <다크 나이트>는 예상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려간 영화였다. 놀란 감독은 그 어떤 세트도 만들지 않았다. 시카고, 뉴욕의 길거리 그대로를 촬영했으면서 시침 뚝 따고 ‘고담시’라고 말한 것이다. 종로 1가를 찍어놓고 외계행성이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 이 대담한 ‘리얼리즘 아닌 리얼리즘’은 매우 독창적인 선택이었다. 고담시는 이제 공상의 도시가 아니라 미국의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의) 현실 그것이 되었다.
뉴욕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시카고는 미국 체류 이전엔 가본 적이 없어서, 영화와 얼마나 비슷할지 궁금했다. 대륙횡단 여행 (‘대평원 횡단여행’ 매거진 참조) 이전에도 시카고만을 목표로 길을 떠나기도 했고, 횡단 여행 중에도 뉴욕주로 돌아올 때 북쪽 루트를 택했기 때문에 지나가게 되었다.
시카고에 대한 내 첫인상은 “중세의 장엄함을 20세기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성공한 도시”였다. 깎아지른 듯 솟아있는 맨해튼의 마천루들도 어딘가 중세적인 데가 있지만(천국에 가닿기를 소망하며 한없이 높이 올린 성당처럼!), 시카고는 더 서쪽의 도시답게 건물들의 덩치가 더 컸고 그래서 더 위엄 있었다. 해가 쨍한 날에도 건물들이 만든 그늘은 서늘했고, 그 속을 걸어가면서 건축이 “문명의 영혼(the soul of civilization)”이라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놀란 감독이 어떤 의도로 시카고를 촬영지로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도시는 모든 면에서 ‘어둠의 기사(Knight)’라는 제목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끝없는 평야 위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도시 시카고는 그 덕분에 아주 독특한 야경을 갖고 있다. 원근법 교과서에 나오는 듯 격자 무늬의 질서정연한 길들이 소실점을 향해 마치 비행기 활주로처럼 장대하게 펼쳐진다.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윌리스 타워(Willis Tower) 꼭대기에는 바닥이 유리로 된 전망대가 있는데,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여행에서 너무 마이너스가 되는 요인인데 타고난 거라 어쩔 수가 없다)는 밤인데도 유리를 밟지 못하고 유리 앞에서 어정쩡한 포즈를 취했다. 어둠의 기사가 되는 건 쉽지 않쿤…
- 시카고엔 그 외에도 드넓은 미시간 호수, 프랭크 로이트 라이트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물들, 아니쉬 카푸어의 클라우드 게이트 등 여러 유명한 것들이 많지만 일단은 <다크 나이트>를 위해 첫머리를 할애해본다.
(주의! 여행시기가 옛날입니다.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