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석 게임 27_시작
푸른 눈빛 4-1.1권
재래식 화장실 문
개미굴 같이 생긴 이 동네에 존재했던 화장실.
저 안에 내가 숨어있다.
내가 삶에 파놓은 여러 길중 하나,
그 길의 모양이 저 네모에서 시작한다.
비 오는 어느 날 밤
"쾅! 쾅! 쾅!"
누가 문을 세게 두드리는 것 같은데, 문을 열 수가 없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눈이 감기면 안 될 것만 같다.
고통스럽다. 두렵다. 정신 차려야 한다.
의식을 안 잃으려고 물을 끼얹고,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봤다.
'으아아'
주먹을 날렸다.
'와장창'
거울이 깨졌다.
깨진 거울 속에 내 얼굴이 조각나 보인다. 싸늘히 식은 창백한 얼굴이 시야에서 흐릿하게 사라져 간다. 세면대를 겨우 붙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깨진 거울 파편과 떨어진 핏방울이 솟구치듯 떠올라 얼굴에 박힐 것만 같다.
'콰광, 쿵'
땀이 식어가고 있는 건가? 춥다. 한기를 느끼며 기억이 끊겼다.
한 달 후
뭘 하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그새 한 달이 또 훌쩍 지나있었다. 오늘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서 칼을 집어 봤다. 실제상황처럼 감정선을 잡아보았다. 순간, 예전 화장실에서 처음 기절했던 날이 떠올랐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나는 숨 쉴 틈도 없이 칼을 던져버렸다. 잠시 멍하게 서있었다. 어느새 온몸에 땀이 나있었다.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1년 후
기억의 공백이 너무 두꺼워졌다. 지난 1년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살았던 세상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확신이 안 선다. 오늘을 그 마지막 날로 결심했지만, 두렵고 무섭다. 의식을 쉽게 잃는 방법이 없을까? 의식을 잃어야지만 죽음의 공포를 넘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지 않으면, 내일 또 죽을 것 같은 세상에서 눈을 떠야 한다.
몇 분 후
눈을 떴다. 내 손엔 여전히 칼 한 자루가 쥐어져 있고, 칼날은 손목의 생명줄 위에 올려져 있었다. 눈을 감기 전 그 모습, 그 각도 그대로였다. 그 칼끝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재래식 화장실에 숨어 지내던 초등학생 아이가 느닷없이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동안 나를 한 번도 바라봐주지 않았어요?"
"그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알아요?"
"이대로 죽으면, 나 어떡하라고?"
그 순간,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했다.
눈물이 고이고 나서야, 들고 있던 칼을 던져버렸다.
눈 한 번 깜빡인 것 같은데, 몇 분이 지나있었다. 잠이 들었던 건지, 의식을 잃었던 건지 모르겠다. 잠깐동안의 꿈이라고 하기엔, 떠오른 장면이 너무 길고 진짜 같았다.
난 고개를 떨군 채,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목놓아 소리쳤다.
내 생애 가장 긴 시간을 울었다.
오늘 그 아이가 살던 마을에 다시 섰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지난날들이 내게도 스쳐 내렸다.
그 아이를 만나고 난 후,
삶------죽음
이 사이의 선이 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었다.
그건 칼로 그으려던 선이 아니라, 숨이 이어지는 선이었다.
그 선 위로 흐르는 숨 사이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그 아이와 나의 두려움이었다.
삶---나, 두려움---죽음
늘 숨어 지내던 한 아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내가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았던 것이었고,
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다.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죽어도 죽기 싫어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짓들이 죽음으로 가고 있다는 걸,
그 아이도 나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난 죽음이 두렵다고 피해다는데,
숨으러 도망가는 방향이 죽음 쪽이었다.
삶의 하루를 학교 결석할 때처럼 도망쳐 다니지만,
결국 들어가 숨은 곳은 그렇게 싫어했던 집이었다.
세상이 힘들다고 피해 다니지만,
도망친 곳도 결국 세상 안이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그 아이가 숨어있던 재래식 화장실 문을 보았다.
저 네모난 화장실 문 너머에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모양들이 있다.
□ 화장실에서 처음 느낀 귀신에 대한 공포감.
□ 화장실에서 처음 느낀 죽음에 대한 공포감.
▩ 깨진 거울에 비친 일그러져 보이던 내 모습. 파편처럼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한 내 존재.
귀신, 죽음, 깨지고 조각난 내 존재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세상 그 어느 곳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내 내면의 집 어딘가 화장실 같은 곳에 숨어있는 그 아이.
내가 먼저 찾아주길 바랐던 그 아이와의 숨바꼭질.
난 내가 술래를 할 차례가 오면,
사실 그게 언제인지 몰랐던 날이 계속 이어졌고,
행여나 운이 따라 안다 해도 찾을 생각을 지속적으로 안 했다.
이러나저러나 내가 안 찾았다는 결과는 변함없다.
그 사이에 아이는 하염없이 숨어있다가 지쳐갔다.
그러다 그날, 감정이 엉망진창인 상태로 나를 찾아왔다.
내 사랑을 한 번을 제대로 못 받고 끝나는 것이 그 아이의 가장 두려운 거였다.
그 아이가 저 문 안에 숨어있다.
내 삶의 틀이 점점 작아지고 좁아져가는 걸 느낄 때
그 아이는,
혹시 이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닌지 모른다.
내가 만든 틀에 못 들어가면,
내가 자신을 못 볼까 봐 두려워했을 수 있다.
아까 대문 안에서, 앞마당에서,
나를 귀신처럼 봐서 질렀던 비명이 아니라,
내가 먼저 뒤돌아 봐주길 바라던 절규였던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 것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 아이가,
내가 만든 그 좁은 틀에 들어가려고 힘들었을 걸 생각하니, 전하고 싶은 말이 생긴다.
"넌 어쩔 수 없었어. 내가 더 큰 틀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돌아봐주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러니 더 이상 너를 탓하지 않아도 돼. 다 내 탓이니까. 힘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살아줘서 고마워"
p.s
"언젠가 이 마을처럼 비가 오는 날, 일기장에 써놓은 글이 있어. 늘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어."
사랑만큼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끊기는 순간이 있다. 사랑도 끊기면 그만큼 마음 아픈 것도 없다. 그 누가 내 곁에 없어도 항상 모든 시간을 함께 하는 걸 사랑한다면 안 끊길까? 나 죽을 때까지 내게 절대 떨어지지 않는 숨과 나를 사랑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기분 좋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돌아보니 너는 숨은 적이 없더라. 내가 나마저도 피하고 도망 다녔던 거지. 그래! 난 지금 이 순간부터 숨과 너를 그리고 나를 사랑하기로 한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