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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ug 06. 2023

난생처음 사과파이

딸아 미안.....

친정 엄마가 가끔씩 장을 봐서 우리 집에 뭔가를 가져다주실 때가 있다.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셨는데 요새는 바쁘셔서 몇 달간 소식이 없으시다가 갑자기 지지난 주 막둥이 생일 때 뭔가를 한가득 들고 오셨다. 그중에 사과 한 봉지가 있었는데 냉장고에 빈자리가 마땅치 않아 두었더니 사과가 급속도로 상해 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냥 버릴 수는 없는데 당장 수요일부터 너무 바쁘고 교회 청소년 학교 일정으로 인해서 사흘간 집을 비워야 하는 상황이라서 일단 냉장실에 어떻게든 쑤셔 넣었다.


지난주 여행 및 기타 등등의 일정으로 바빴더니 집안이 엉망이고 냉장실도 어수선했다. 가득 쌓인 피클들과 치킨무들을 과감하게 비워냈다. 눈에 들어오는 남은 음식들이 좀 있었다. 돈가스와 참치캔 뜯어놓은 것으로 참치 전을 만들어주고는 생각했다. '저 사과들을 어떻게든 해야겠어."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은 사과파이. 사과 필링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잘게 썰어서 설탕과 계핏가루를 넣고 졸이기만 하면 끝이다. 문제는 파이지다. 만들기가 너무너무너무 귀찮으니 쿠팡에서 주문을 할까 싶어 검색을 해 보는데... 으아.... 비싸다!!! 물론 수고에 비하면 편리하고 합당한 가격이겠지만 25천 원 되는 가격을 훌쩍 지불하자니 원가 가격을 알아서 고민이 되었다. 아휴 만들자 뭐 그까짓 거. (문제는 예전에 타르트는 한 번 만들어 봤지만 사과파이는 처음이다.)


파이지 반죽은 오래 하면 안 되고 차갑게 해야 하고 버터는 깍둑썰기로 해야 하고 등등.... 은근히 귀찮다. 베이킹 좋아하고 협조적인 큰 딸을 소환한다. "ㅅㅇ아! 엄마랑 사과파이 만들자!" 말하자마자 와서 버터 자르는 거 도와주고 밀가루 계량하는 거 봐주고 정말 열심히 보조를 잘해 준다. 이제 찬물을 붓고 조금 더 반죽을 해야 하는데 레시피에 나온 대로 찬물을 다 부으면 반죽이 질어질 것 같다. 3분의 2 가량만 부었는데 역시 짙다. 밀가루를 재빨리 조금 더 투하한다. 여름엔 버터가 잘 녹고 오늘은 비가 와서 습도도 높기 때문에 수분함량을 레시피대로 하는 것보다는 느낌대로 가야 한다. 반죽놀이 좋아하는 초등학교 3학년 막둥이도 소환해서 반죽을 조금 하게 했다. 버터의 몽글몽글한 느낌이 좋다. 셋이서 번갈아 가면서 반죽을 하고 냉장실에 넣어서 1시간 휴지를 시킨다.


그 사이 열심히 거실과 방바닥을 청소했다. 캐리어 짐도 정리해 놓고 물놀이 용품도 정리하다가 안 되겠다. "모두 하던 거 정지!! 와서 자기가 어지른 물건 다 치우고 보던지 먹던지 할 것!" 아이들 네 명이 휘적휘적 와서 치운다. 책도 치우고 옷도 치우고 쓰레기도 버리니 금방 끝났다. 이제 한결 청소가 쉬워서 쓱쓱 바닥을 깨끗이 다 닦고 나니 몸은 좀 피로하지만 마음에 또 평화가 찾아왔다. 주말이라도 집안을 정돈할 수 있으니 너무 좋다라고 생각했다.


이제 파이를 만들 차례이다. 아메리칸 쿠키는 그냥 대강 대강 반죽을 얹어놓으면 되는데 사과파이는 밀대로 밀어야 한다. 밀고 나서 오랜만에 파이 틀을 꺼내서 파이지를 올리고 사과 필링을 채우고 윗부분을 장식하기로 했다. 빨리 하나 구워서 어떻게 되나 보고 싶은 마음에 대강대강 올리고 있는데 큰 딸이 잔소리를 한다. "그거 아니야! 격자무늬로 엇갈려서 놔야지!" "아 그냥 하자." "안된다고!" "그래. 이렇게?" "어후 그게 뭐야! 안 예쁘잖아! 다음 것은 내가 할 거야!" 순간 내 동생의 모습이 큰딸에게서 보이는 것은 착각인가.....

일단 빨리 굽자고 대강 만들어서 오븐에 넣으니까 큰 아이는 그만 뿔이 나 버렸다.

"나 안 해!"

 "에이 괜찮아 다음 거 다 너 마음대로 정성껏 해!"

"사과파이 굽는데 한 시간 걸린단 말이야!"

(파이틀이 하나뿐이라 다 구워지기 전까진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아.... 그러니....."

(하도 오랜만이라 15분만 구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토스트냐..ㅡㅡ;;)


야아.... 미안하다.....

어쨌거나.... 파이는 오븐으로 들어갔고 남은 파이지는 다시 냉장실로 들어갔다. 그냥 두면 반죽이 녹아서 흐물거리기 때문이다. 삐짐의 기운을 내뿜으며 딸아이도 방으로 문 닫고 들어가 버렸다. 머쓱하다. 다음엔 별 거 아닌 일로 딸과 신경전 벌이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모양은 이래도 맛은 꽤 좋아서 다이어트 중인데 한 조각을 먹어버렸다. 큰 아이 맘도 사르르 풀려서 맛있다고 먹으며 내일 남은 것을 예쁘고 완벽하게 만들기로 했다. 맘 풀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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