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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려다 다시 들고 온 할머니의 돗자리

by 여울

어제는 작정하고 거실과 안방 베란다를 비워내었다. 신랑의 책박스 들도 함께 비우고 싶었지만 한 번 살펴봐야겠다고 해서 그것까지는 못하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들을 다 비워냈다. 두 개의 의자, 진공청소기, 습식청소기, 부서진 킥보드, 작아진 킥보드, 심지어 유모차까지 있었다. 막둥이가 초등학교 3 학년이니 도대체 몇 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치우면서 좀 어이가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줄까 싶어 가지고 있다가 잊었나 보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주신 돗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돗자리 커버는 삭아서 저절로 떨어진 지 오래였고 나는 결혼 후 저 돗자리를 한 번도 편 적이 없었다. 십몇 년간 들고 다니기만 했던 돗자리. 그것은 할머니가 내게 주신 결혼선물이었다.




나는 할머니에 대한 좋은 추억이 별로 없다. 사실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외가친가 모두 그랬다. 4남 3녀 중 삼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난 아버지. 2남 4녀 중 맏딸이지만 역시 셋째 아이였던 어머니. 내 위아래로는 사촌들이 무수하게 많았고 할아버지할머니는 시골에서 농사일과 다른 손자들, 자식들 건사하기도 바쁘셨다. 내 사촌들은 사정상 할아버지 댁에서 몇 달에서 몇 년씩 살기도 했다는데 우리 부모님은 자식은 부모가 키우는 거라면서 어려운 단칸방 살림에도 절대 우리를 떼어놓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일 년에 두어 번 무궁화호를 타고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어서 가면 나오는 초가지붕을 이은 시골집이었다. 사촌들과 노는 것은 즐거웠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도 재미있었고 그 옛날식 뒷간이 존재하는 것도 싫지만 놀라웠다. 그렇지만 할머니할아버지는 여전히 멀리 계신 분들이었다. 수십 명의 손주들 가운데 중간에 낀 여자아이 둘은 그분들께도 그냥 손주들 중 둘 아니었을까.


할머니와 관련된 몇 안 되는 드문드문한 기억들은 대체로 좋지 않았다. 할머니는 손'자'들은 귀애하셨지만 손'녀'들은 그냥 그랬다. 그래도 함께 살았던 큰아버지의 큰딸인 제일 큰 언니는 첫 손주 이기도 했고 정이 들었으니 아끼셨고 막내 작은아버지의 두 손녀들은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제일 오래 살았으니 또 아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사촌들과 같이 있으면 그들을 우선시하셨다. 한 번은 다 같이 딸기를 먹고 있는데 접시를 가져가시면서 "ㅅㅇ이 더 먹어라. 너네는 그만 먹고."라고 하시는 것이다. 같이 있던 사촌오빠들까지 벙쪄서 "아니 할머니 왜 그러세요."라고 할 정도였다. 대놓고 편애하는 모습에 그렇잖아도 가깝지 않았던 마음은 더더 식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 갑자기 할아버지 할머니를 서울 우리 집에 모시게 되었고 1년 정도를 같이 살았다. 같이 사는데도 참 어렵더라. 두 분은 고향을 그리워하셨고, 할아버지는 갑자기 죽더라도 집에서 죽어야겠다고 휘적휘적 옷을 입으시고 그 길로 고향으로 가시더니 3개월 후 임종을 맞으셨다. 할머니는 그대로 그 집에서 사셨는데 사연이 많았다. 두 분이 갑자기 우리 집으로 올라오신 것은 함께 살던 작은아버지가 장인장모도 함께 모시기로 하면서였다. 한집에 어른 네 분이 같이 살게 되면서 사이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견디기 힘드셔서 결국 도피성으로 오셨는데 할머니는 그래도 작은아버지 댁 손주들과 십 년을 넘게 같이 사셔서 그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아주 각별했다. 그러니 데면데면한 우리 둘과는 비교도 안 되었으리라.


그렇게 거기서 몇 년을 더 사셨는데 결국 몸이 너무 쇠약해지셔서 다시 우리 집에서 모시게 되었다. 평생 살던 고향을 떠나고 평생 애지중지 키우던 손주들을 떠나서 서울로 오게 되신 할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나도 짐작이 간다. 그것도 쫓기듯이 아무것도 없이 떠나셨으니. 할머니는 몹시도 서럽고 한이 맺히셨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정말 몇 시간씩 날마다 사돈댁에 대한 험담과 막내며느리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끝없이 하셨다. 듣다 못한 아빠가 "어머니 그만하시지요."라고 하셔도 할머니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계속 설움을 이야기하셨다. 사돈댁과 작은엄마에게서 할머니가 받으신 박대는 내가 들어도 어쩌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은데 유순한 성정의 할머니는 그냥 그렇게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당하셨던 것 같다. "아빠. 할머니는 아마 속에 있는 서러움을 토해내는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정말 1년이 지날 무렵부터 할머니의 성토는 서서히 줄기 시작해서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돌아가시기까지 십 년 넘게 모시고 살았어도 할머니는 여전히 작은아버지댁 아이들을 못 잊어하셨고 그리워하셨으며 우리 자매와는 서먹했다. 그랬던 할머니가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까 주신 선물이 꽃그림이 그려진 돗자리이다. 하나 필요할 거라면서 제일 예쁜 것으로 사라고 하셨는데 돗자리에도 매난국죽이 수 놓인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돗자리는 폐백 드릴 때 바닥에 놓고 썼고, 그 후로 교회에 결혼식이 있을 때면 역시 폐백연에 놓였다. 우리 집에서는 딱히 놓을 일이 없었다. 그렇게 십육 년..... 베란다에 보관되어 있던 그 돗자리의 한쪽은 약간 곰팡내 비슷한 것도 나는 것 같고 애물단지처럼 되어서 우리는 돗자리를 처분하기로 했다.


대형폐기물딱지까지 붙여서 내놓고 치우느라 힘들어 잠시 쉬고 있는데, 자꾸 생각이 났다. 한 번도 예쁘다고 말해 준 적이 없는 할머니에게서 내가 유일하게 받았던 선물인 그 돗자리. 저렇게 딱지 하나 붙여서 그냥 보내버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게 맺혀왔다. 결국 한밤중에 나는 다시 나갔다. 몇 번을 펴서 보고 접고를 반복하다 결국 그냥 들고 들어왔다. 내가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겠다고 집의 물건들을 다 비워내고 있지만 그래. 너 하나 놓을 자리가 없겠니. 어쩌면 할머니에게서 받고 싶었던 사랑을, 못 받아서 서러웠던 그 마음속에서 평생 녹여내지 못하고 쌓여있었던 그 벽을 낮추고 싶었던 할머니의 작은 손짓을 어젯밤에야 제대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다른 손주들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그만큼 아픈 손가락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귀한 손가락이었으리라. 할머니. 미안해요. 늦었지만 많이. 미안합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우리 엄마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잠을 주무시듯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 나 대신 우리 착한 큰딸의 애정도 받으셨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할머니 화장실 가실 때마다 손을 잡고 부축해 드리고 챙겨드리는 순수한 사랑에 기꺼워하셨다. 그래서 나는 큰 아이에게 늘 고맙다. 마음이 좁은 손녀가 드릴 수 없었던 사랑을 증손녀가 대신 전해드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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