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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딸아이 방문 열기가 덜 두렵다

옷 비우던 날 일어난 이야기

by 여울

예전에 딸아이 방문 열기가 두렵다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딸아이 방문 열기가 두렵다 (brunch.co.kr)

그 후로 몇 번의 큰 심호흡을 하고 두어 번 더 대청소를 했다. 그러나 자꾸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작정을 했다. 책장 겸용 소파를 빼내고 다른 자잘한 짐들을 과감하게 빼내었다. 가방은 무조건 걸 것. 다만 부피가 크고 무거운 책가방만 책장 앞에 잘 기대어 세워 놓을 것. 방바닥에 옷과 책을 놓을 경우 자기 전에는 무조건 치울 것. 이렇게 원칙을 정해 주었다. 지난번에 뺀 옷들은 큰 쇼핑백 두 개에 담아서 놓았는데 두 달 가까이 그냥 그 상태로 거실에 두고 있었다.....


그냥 옷상자에 넣자니 좀 아깝고 누군가 주고 싶은데 주변에는 이상하게 남자아이들만 가득하고 저 옷들을 입을만한 나이의 여자 아이가 없었다. 당근에 럭키박스처럼 올릴까 하다가 그래도 어떤 옷들인지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 것이 낫겠지 싶어서 방학 때 드디어 정리를 했다. 약간의 얼룩이 있지만 상태가 나쁘지 않고 편하게 입을 만한 옷이 네댓 벌, 나머지는 짱짱하니 좋았다. 스커트만 여섯 벌인데 44 사이즈 입으시는 분들 입어도 될 만큼 좋은 옷들이었다. 택도 안 뗀 게스 청바지나 택만 제거한 랠프로렌 셔츠원피스 같은 브랜드 새 옷들은 그냥 따로 파는 것이 이득이겠지만 그냥 한 번에 처리하고 싶어 일괄 5만 원에 올려두었다.


다음 날 바로 연락이 왔는데 공교롭게도 셋째를 따라 2박 3일 집을 비우는 일정이었다. 목요일 저녁에 올라간다고 말씀드리니 집에 와서 알려달라고 저녁때 오시겠다고 하셨다. 필요하시면 신발도 같이 드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예약을 걸어두었다. 그런데 막상 서울 와서 연락을 하니 상의가 몇 벌이 있냐고 하시면서 고민을 해 보겠다고 하셨다. 사흘이나 예약을 걸어두었기 때문에 다른 연락은 받지 못했기에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해는 되었다. 당근에서 5만 원이면 큰돈이다. 아무리 서른 벌이 넘는 옷들이라도 선뜻 구입하기에는 망설여졌을 것이다. 당근에서 '고민해 볼게요'는 대부분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여쭤 보았다. "그럼 예약 취소할까요?"


상의는 보통 얼룩과 이염이 많다. 아무래도 음식물을 흘리기도 하고 활동을 하다 보면 뭔가가 묻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더 오염이 눈에 띄는 옷들은 아예 포함을 안 시키기도 했고 지난번에는 대강 정리한 부분이라 다른 옷상자와 서랍에 있는 옷들까지 꼼꼼하게 살피지는 않았다. 예약 취소를 물어보기 전에 이러이러한 상의가 열 벌 정도 더 있고 필요하시다면 겨울 파카도 하나 드릴 수는 있다고 했다. (이 역시 생활 얼룩은 있지만 상태는 좋은 옷이었다.) 그러자 바로 가지러 오시겠다는 답변이 왔다. 찾는 김에 더 찾고 아이들이 안 입는 옷들을 조금 더 살펴보니 얼룩 없이 깨끗하고 상태 좋은 상의도 여러 벌 나와서 기쁜 마음으로 넣었다.


딸 쌍둥이라고 하셔서 뭐라도 더 드리고 싶었다. 여자 아이들이 쓰기 좋은 모자도 두 개 넣었고, 공책도 종류별로 두 권씩 새 공책들도 맞춰서 넣고 신발도 발 사이즈에 맞게 괜찮은 것들로 넣었다. 옷과 물건이 많아 쇼핑백 네 개에 담았는데 용량 초과로 엘베로 내려가다가 끈이 떨어져서 조금 난감하기도 했다. 그래도 멀리 우리 집까지 와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당근에 리뷰를 써서 인사를 했다.


그렇게 보내고 난 후 산책을 하면서 친구에게 거의 50개에 가까운 물건들을 오만 원에 드렸다고 하니까 친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무슨 한숨인지는 안다. 그래도 같이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또 약간 얼룩이 있는 옷이라도 그리고 내복과 신발이라도 최대한 많이 필요하다고 하시니 겨울옷까지 뒤지다 발견한 두어 번 입고 말았던 깨끗한 내복까지 짧은 시간에 내가 챙길 수 있는 것들을 다 챙겨서 보냈다. 신발과 내복도 함께 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지방에서 올라오자마자 최선을 다해서 많이 추가를 했기에 직접 쓴 답장을 기대했었나 보다. "예상보다 더 많이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한 줄 정도 말이다.


그런데 리뷰는 그냥 기본적인 체크리스트로 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것은 '내가 하지 말았어야 했던 기대를 했기 때문이구나' 싶었다. 그냥 주는 기쁨으로 끝냈어야 했는데. 뭔가를 바라는 마음이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 파카는 따로 팔 수도 있었는데.... 이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뭐 이미 지난 일이다. 아마 그분은 생각보다 별로라고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만 괜찮았을지도...





한 번 그런 마음이 들자 그동안 나눔이나 당근을 하면서 안 좋았던 기억들도 함께 올라왔다. 선의로 한 나눔에 밤새 문자를 보내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하소연을 한 경우부터, 원래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달라는 요청에 추가로 시간을 들였는데 이미 안 좋은 평점을 남겼던 경우 등등 잊고 있었던 속상한 기억들이 물밀듯 올라왔다. 어쩌면 별 거 아닌 리뷰의 중요성을 내가 너무 과대해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얻은 것은 조금 더 청소가 간편해지고 바닥이 보이는 아이들의 방이다. 옷장에 좀 더 여유 공간이 생겨서 파악도 더 쉬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문을 열어 보기가 한결 맘이 편하다. 아직도 창가 쪽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지만 한편을 비워내면서 짐이 덜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내 마음에서도 불필요한 감정들을 덜어내고 비워내서 다른 좋은 여유로 채워보자. 아마 아이들 챙기느라 한 줄이라도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 역시 다른 분들께 수많은 나눔과 도움을 받아왔기에 소소하게라도 나누고 도울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다른 분들을 도와주시고 필요한 것을 나누시는 분이실 것이다. 늘 좋은 것은 나름의 영향력으로 퍼져나간다고 생각한다.


비우고 정리하기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이렇게 조금씩 진행 중이다. 나도 다른 분들처럼 "어머, 집이 신혼집 같아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아니 최소한 "어머, 아이가 하나 있는 집 같아요!" 정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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