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아. 너 아침마다 책을 읽고 있던데 무슨 책을 읽고 있니?" "셰익스피어 희곡이요." "책도 좋은데 중3이니까 연합고사 공부도 신경 써야 하는 거 알지?" "네. 알아요 선생님. 공부도 같이 하고 있어요."
중학교 3학년 아침 자습 시간에 반 친구들이 모두 문제집을 풀 때 나는 셰익스피어 희곡선을 한 권 한 권 독파하고 있었다. 세로줄이라 조금 힘들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담임 선생님 입장에서는 조금 애가 타셨을 것도 같다. 공부를 해도 모자란 시간에 책이라니.... 그때는 연합고사 기준선을 못 넘으면 일반계 고등학교를 가기가 힘들었고 실제로 반에서 한 친구는 못 갈 뻔하다가 후기로 어떻게 붙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의 걱정 어린 시선이 있었지만 책도 읽고 공부도 조금 했다. 그냥 문제집을 푸는 것은 사실 너무도 재미가 없었다. (연합고사 때 나는 200점 만점에 192점으로 가뿐하게 통과했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던 아이들이 커가면서 점점 독서량이 멀어지고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성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책을 멀리한다는 이야기는 우리 집에서는 해당 사항이 없을 줄 알았다. 집에 있는 책만 이미 빼낸 책들을 제외하고도 5천 권이고 내가 항상 책을 읽고 있으니 굳이 책을 읽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가 아이들에게 책 읽는 습관을 지속적으로 잡아주는 데에는 엄마의 소리 없는 모범만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들이 커 가면서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친정아버지의 노력이 컸다. 매주 일요일 오후에는 나와 동생을 불러 앉히고 책을 한 도막 씩 소리 내어 읽어 주셨고, 가끔씩 시를 같이 낭송하고 암송하게 시키셨고, 나중에는 신문의 기사나 사설을 읽고 같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래서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다 우리 아빠 같은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신랑은 책을 안 읽는 사람이었으며 TV를 즐겨 보고 내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면 정말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이 가아끔 읽어주다가 결국에는 이마저도 흐지부지 된 지 한참이다. 그래서 가끔 영어책 읽어주기의 힘 저자이신 고광윤 교수님이나 페르세우스 작가님 같은 분들을 보면 그 가정의 아이들은 얼마나 복 받았는지 그리고 그 배우자 분들은 정말 너무 좋으시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나만의 책 읽기에도 한동안 바빠서 혼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더니 큰 아이들이 서서히 책을 멀리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각자 가지게 된 스마트폰이 제일 나빴다. 어떻게 막아 두어도 어떻게 풀어버리는 아이들의 교묘한 기술은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우리 반 아이들과 우연히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이들 왈, "선생님! 패밀리 링크 풀기가 가장 쉬워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구나.... 순진한 나만 몰랐다.
여하튼 그리하여 둘째와는 6개월 전부터 30분 컴퓨터 자유시간을 위해서는 책을 30분 읽어야 하는 것을 서로 약속으로 정했다. 둘째도 문해력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 다만 책을 읽는 것보다 웹툰을 보는 것이 훨씬 간편한 것을 본인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일 뿐. 그렇게 지내다가 어제부터 온 가족 독서 시간을 30분씩으로 정했다. 9시가 되면 그냥 다섯 명이 모여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막내의 반발이 조금 있었지만 ("나는 계속 책을 읽고 있는데 그래도 모여서 읽어요?") 그래도 같이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의외로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같이 거실에 모여서 두어 명은 누워서 읽고 두어 명은 앉아서 읽는다. 30분 정도 정해 놓고 음악도 없이 책을 읽는다. 각자 원하는 책이 다르지만 그냥 읽는다. 그리고 30분이 지나면 다시 알아서 흩어진다.
오늘은 도서관에 오랜만에 갔다. 늘 나 혼자서 책두레 서비스라는 상호대차를 이용하거나 도서관에 가서 빌려 왔는데 작정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딸아이들 미술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떡볶이를 사서 먹이고 도서관에 가서 각자 책을 골라서 5시까지 있었다. 어린이 열람실과 일반 열람실이 달라서 나는 책을 빌려서 어린이 열람실로 와서 아들들과 읽었고 딸들은 일반 열람실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5시에 문을 닫아서 어쩔 수 없이 나와서 딸들을 만났다. 둘째가 수줍게 말하길, "나 좀 졸려서 자는 바람에 이만큼 밖에 못 읽었어." 그래도 좋았다. 원래 책 읽으면 졸린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읽다가 졸다가 다시 읽는 것이다. 책은 원하는 대로 아무거나 읽으라고 했다. 둘째는 로맨스 소설을 골랐고, 첫째는 추리물인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로판이었다고 했다. 제목이 어둠의 손길이라나. 듣자마자 딱 느낌이 오는데 아직 청소년 아이에게는 구분할 능력이 약간 모자라나 보다. 허허허. "그 손길이 이런 (야한) 손길 아냐?" 그랬더니 깔깔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막둥이는 역사 만화를 신나게 보았고, 셋째는 너무나 애정하는 와니니를 읽고 빌렸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집에 이미 3권까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달리기를 하는 20대의 이야기를 읽었다. 도서관의 여운이 남아서 집에 와서 Six of Crows를 조금 더 읽고 아이들 밥을 챙겨준 후 우리는 또 각자 시간을 가지고 다시 9시에 만났다. 사실 설거지 하느라 깜빡했는데 셋째가 먼저 말했다. "9시니까 이제 곧 모이자!" 그래서 또 조용히 책을 30분간 읽었다. 사실 아이들과 하고 싶은 프로젝트는 많고 하다가 실패한 프로젝트도 많다. 글쓰기 프로젝트도 한동안 하다가 말고 영어공부도 일정 기간은 하고 일정 기간은 말고 그랬다. 원래의 목표는 책 읽고 나서 글쓰기까지 가는 것인데 욕심을 버렸다. 책만 이렇게 계속 읽어도 성공적이다. 이렇게 올해 말까지 같이 모여서 책 읽기가 진행된다면 사실 나는 다른 걱정이 별로 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나중에 조금만 슬쩍 등을 밀어주면 된다. 읽어야 글이 나오니까.
원래는 오늘 추모 집회에 가려고 했지만 우리 아이들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미루었다. 다음 주에 혹시 엄마가 집회에 가야 해서 못데리고 가면 너희끼리 가라고 했다. 맛있는 거 사먹으면서. 그리고 당분간 이런 공적인 사유가 없는 이상 나의 토요일 오후는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 나들이로 채울 생각이다. 우리 오늘 꽤 행복하고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