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반 아이들과 벌써 세 번째 시를 맞이했다. 이번 주의 시는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원래는 김소월 시인의 '엄마야 누나야'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요새 우리 반 아이들 시 암송하는데 물이 올라서 아직까지는 조금 길게 가도 되겠다 싶었다. 시를 외울 때는 길이가 중요한데, 처음부터 약간 긴 시로 했더니 두 번째 시인 서시는 정말 너무 쉽게 외워 버렸다. 11월 정도에 광야를 외우고 나면 보너스 개념으로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 같은 시조 한 편이나 장 콕토의 '내 귀는 소라껍질' 같은 짧은 시 하나 외우면 너무 좋아들 하겠지. 후후. 아직은 시동 단계라서 괜찮다. '서시'를 외우면서 혹시 추가로 외우고 싶은 친구는 '별 헤는 밤'도 도전해 보라고 했더니 정말 그 다음날 '별 헤는 밤'을 다 외워온 아이가 있어서 감동했다. '별 헤는 밤'은 나도 다 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청포도'를 읽고 써 봤다. 시에 '칠월'이 들어가기 때문에 7월에 읽으면 더 좋았겠지만, 1학기에는 예의 그 일로 인해서 마음의 여유가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 모든 시를 읽을 땐 항상 아빠가 생각나지만 유독 청포도를 생각하면 더 많이 아빠가 생각난다. 아빠는 문학을 좋아하셨고 시를 좋아하셨다. 외우기를 곧잘 했던 나에게 시를 외우게 하시고 내가 암송하는 시 듣기를 또 좋아하셨다. 집에 시집이 좀 있었는데, 제일 처음 외운 시가 '청포도'여서 그런지 더 각별하다. 아빠는 손님들 앞에서도 내게 시를 암송하기를 청하셨고 잘하든 못하든 간에 같이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기다리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어쩌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포도알 하나하나는 내가 살아온 마을의 이야기들이 하나씩 다 맺힌 것이고, 저 멀리 하늘의 빛이 이 포도에 또 하나씩 다 담긴 것이다. 저 멀리 파란 하늘과 바다가 보이는 정경으로 하얀 돛을 단 배가 부드럽게 바람을 타고 들어온다. 그리고 기다리던 그분이 푸른 옷을 입고 오는데 다소 지쳐있다. 아아.... 얼마나 그를 기다렸는지 모든 바람이 담기고 열린 이 포도애 즙이 묻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득 딴다. 그래서 미리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해 놓는다. 깨끗한 은쟁반과 정갈한 모시 수건을.
"선생님! 시가 좀 긴 것 같아요! 12행이나 되잖아요!" 하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많이 보이는지 묻고, 하얀색과 푸른색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이야기를 들여다보듯 시를 외우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사실은 이 손님은 우리나라의 독립이라고. 일부 아이들은 이육사 시인이 감옥의 수감번호에서 따 온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제 청포도는 한물갔고 대세는 샤인 머스켓이지!" 아이들은 또 재잘대면서 청포도 시를 입에 담는다. 약간 껍질이 살짝 질긴 듯하지만 상큼한 국내산 청포도는 나도 맛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껍질 채 먹는 수입산 청포도가 더 흔하게 자주 보였고, 요새는 아이들 말처럼 샤인 머스켓이 더더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이들 입에 조곤조곤 시가 담긴다. 시의 향과 시의 선율이 담긴다. 소리 내어 읽으면서 소리를 타고 시의 아름다움이 서로서로의 마음에 스며든다. 한 아이도 하지 않겠다고 뻗대지 않고 다 같이 틈나는 대로 머리를 맞대고 시를 외우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번 주 내내 서시가 들려서 좋았다. 다음 주는 또 내내 청포도가 들리겠지. 다음 주에는 샤인 머스켓 한 송이 들고 가서 시와 함께 나누어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