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럽에 간 적이 없다. 대학시절 위험하다면 안 된다고 하셨던 부모님은 끝까지 허락을 하지 않으셨고 학교와 국가에서 허락한 공식 여행 이외에는 해외에 간 적이 없다. 스카우트 인솔자로 갔던 중국과 일본, 그리고 국가에서 선발하여 간 한 달이 채 못되는 미국 연수가 전부이다.
어릴 때 부터 늘 가고 싶었던 곳은 그리스와 이탈리아였다. 사회 시간에 발표해야 했던 그리스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아테네의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의 흔적이 너무 보고 싶었다. 조금 나이들어 르네상스를 알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중소도시들을 알게 되었고 조금 더 커서 중세사와 르네상스 시대에 관심이 가면서 더더욱 그랬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르네상스 전문가이다. 그래서 그녀의 책들에는 르네상스와 당시 인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과연 이탈리아에 갈 수 있을 것인가. 접어두던 꿈은 이금이 작가님의 페르마타, 이탈리아 를 읽으면서 살아났다. 잔잔한 문체로 한 달 간의 이탈리아 기행을 펼쳐낸 책을 나는 다른 책을 젖혀두고 읽었다. 읽어야 하는 과제들이 있는데 마음에 들어온 책은 무조건 1순위다.
이탈리아 전체를 일주하셨는데 한 도시에 길어야 사나흘이라서 혼자서 너무 안타까워했다. 더 길게 머무르셨다면 더 많이 이야기가 담겼을텐데 자꾸 줄어드는 페이지들이 못내 아쉬워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었는데도 금방금방 넘어갔다. 나는 피렌체와 베네치아, 그리고 로마 정도로만 생각을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안 나온 작은 도시들이 더 가고 싶었다.
이사벨라 데스테가 있었던 만토바 공국이 있었던 티볼리, 카테리타 스포르차가 끝까지 싸웠던 밀라노, 그리고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를 느껴 보고 싶었다.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다는 이사벨라 데스테의 스투디오가 제일 보고 싶었고 데스테가의 분수라는 음악까지 있는 그 정원도 보고 싶었다. 월급을 조금씩 모아서 여행비를 마련한다는 청년의 이야기가 담겨 있던 그 책. 돈을 좀 모아두면 꼭 써야 할 일이 생겨서 나를 위해서는 쓰지 못했다. 이번에 모아둔 돈도 딸 아이의 유럽 여행을 위해서 쓰일 예정이고, 다음에 모아둘 돈은 아들의 야구 관련 일정에 쓰이겠지. 그리고 계속 돈이 들어갈 일들이 생길 예정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빌라데스테를 검색했더니 어느 아가씨의 부모님과 함께 간 여행 일기가 나왔다. 부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나를 유럽에 착착 데려가 주고 비싼 명품 가방을 거침없이 사 줄 수 있는 부모님을 가진 그 아가씨가 부러웠고, 그런 부모가 되어 주지 못해서 우리집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여행이 사람의 시선과 생각을 얼마나 넓혀주는지는 많이 다녀보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기회를 많이 가지지 못해서 아쉽고 많이 가지게 해 주지 못해서 또 미안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고 있는데 거침없는 이 아이의 행동이 참 놀랍다. 나는 부모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 죄송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두려워 공식적인 여행도 가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조금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순종적인 딸이었다. 약간의 반항이라도 있으면 새벽까지 잠을 못 주무시고 근심하는 부모님 덕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어떤 것이 반항이었냐면....머리를 염색도 아닌 코팅을 하거나 귀를 뚫고 오거나 밤에 통금 시간을 어기고 들어오는 것 등등 이었다. 심지어 머리를 짧게 잘랐을 때도 말을 하지 않고 잘랐다고 잔소리를 하셨으니 정말 말 다했다. 그랬으니 여행을 가는 것은 말도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고 겨우겨우 꺼낸 말은 안 된다는 말씀에 다시 꺾였다. 부모님을 존경하고 좋으신 분들이라는 것은 알지만 감사한 만큼 제약도 많았다. 유럽의 귀족 자제들이 필수로 거쳤다던 이탈리아 기행을,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가고 싶어졌다.
다른 어느 곳보다 하고 싶었던 두 가지 중 하나는 이탈리아 문화 기행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국 문학 기행이다. 사실 반은 접고 있던 꿈들이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금이 작가님처럼 예순 즈음에 친구와 함께 가면 참 좋겠다는 희망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수많은 말들이 달렸을 아피아 가도는 막상 가면 내가 생각한 모습과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 나름으로 좋지 않을까. 그렇게 또 꿈을 꾸면서 다시 책을 펴 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