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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Sep 13. 2023

미술이 제일 어려웠던 아이, 마흔 넘어 수채화를 그리다

그리고 함께 그리다


오늘은 교원학습공동체 수채화 동아리가 있는 날이다. 올해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 하나는 수채화를 함께 그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내가 준비해야 한다. 작년까지는 멘토 선생님을 찾아가 배우면서 그렸는데 올해부터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눴다. 우리 반 아이들과 그리기, 동아리 활동부서로 6학년 아이들과 그리기, 그리고 교원학습공동체로 선생님들과 그리기.


처음에는 그냥 진짜 함께 그리기만 생각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림이 미치도록 좋았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 시간은 늘 어려웠다. 그대로 명암만 표현하면 되는 데생은 조금 할 수 있겠는데, 디자인을 하고 색을 입히고 명암 표현을 하는 것은 늘 힘에 부쳤다. 그래서 미술 시간이 오면 반갑지 않았다. 그림을 잘 그리고는 싶었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들 중 하나.


당연히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일도 늘 도전이었다. 나도 그림을 못 그리는데 어쩌란 말인가!!! 물감을 써야 하는 수채화 시간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재작년에 학교 선배님이 수채화 동아리를 하자고 하셔서 걱정 80퍼센트의 마음으로 간 그날이 내게 또 다른 취미를 가져다줄 줄은 정말 몰랐다. B6 사이즈 크기 정도의 작은 종이 크기에 마음의 부담도 작아졌다. 작은 종이는 금방 찼다. 크게 채우지 않아도 되고 작게 그리니 아기자기한 맛도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무심결에 지나치는 나뭇가지 하나, 풀잎 하나, 벽돌 한 장 조차 다 그림이더라.


아이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선생님들과는 그냥 그리고 싶었다. 내가 뭐라고 가르쳐 드린다는 말인가. 그러나 오신 분들은 정말 준비물부터 새로 장만하셔야 했고 결국은 내가 조금씩 알려드리고 봐 드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연습과 준비가 필요했다. 자료를 찾고 영상을 보면서 공부하고 미리 그려보면서 감을 잡는 일은 그냥 뚝딱하고 나오지 않았다. 생각과는 다르게 한 번 준비한 자료로 세 번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반 아이들과 한 번, 동아리 아이들과 한 번, 선생님들과 한 번. 물론 동아리 아이들이 제일 다양한 기법을 배워갔지만 이렇게 세 번을 하면서 나도 함께 자라 갔다. 확실히 무엇인가를 제일 잘 배우는 길은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수채화를 시작해서 조금씩 물감과 물과 친해져 갔다. 2학기가 되었으니 바다 풍경을 그려보리라 했다. 아이들은 "아니 선생님!! 저희는 레벨 1이었는데 갑자기 레벨 3이 되었잖아요!!"라고 했지만 결국엔 이렇게 그림을 그려 주었다.





"선생님 너무 어려워요!!"가 속출했지만 기어코 이렇게 완성해 왔다. 저 하얀 물거품이 이는 파도 그리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고 하늘의 구름을 표현하는 것도 정말 쉽지 않은데 아이들 고유의 성격이 보인다. 솔직히 중간 즈음에는 '이거 큰일이다. 그만둘 수도 없고.'라고 생각했는데, 완성된 작품들은 괜찮다. 어쩌면 내 눈에만 괜찮을 수도... 나는 도치 선생님이니까.


여섯 장의 바다 풍경을 그렸는데 그릴 때마다 계속 달라졌다. 비슷한 풍경인데 다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계속 그리다 보니 내가 표현하고 싶은 풍경이 어떤 느낌인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는 풍경을 좋아한다. 여전히 물감은 나에게 어렵고 마음대로 표현은 안 된다. 그래서 수채화 입문 3년째에 접어드는 지금도 종이를 꺼내고 팔레트를 펼치는 과정은 한 번 심호흡을 필요로 한다. 그래도 일단 물을 종이에 깔고 물감을 올리고 손을 움직인다. 과감하게 혹은 세심하게. 자연스러운 번짐으로 느껴지도록 경계선을 풀어주고 다른 색을 올려서 녹아들게 한다. 아직도 서투르지만 그래도 이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즐겁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더 넓고 깊게, 그리고 지나가다 보면 놓치게 되는 수많은 것들을 한 번 더 보면서 감사하고 애정을 갖게 되는 것. 말과 글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들을 담아내면서 그렇게 내 마음을 도닥여 주는 것. 수채화의 힘이다. 오늘 오신 선생님들 모두 열심히 그리셨고 만족한 마음으로 돌아가셨다. 같은 그림을 그려도 정말 성향 따라 다 다르다. 화려하고 진한 그림, 은은하고 부드러운 그림, 아기자기 사랑스러운 그림, 선이 분명하고 깔끔한 그림.... 그렇게 다 달라서 또 좋다. 결국 나는 이렇게 함께의 힘을 또 느낀다. 혼자서 수채화를 그렸다면 이만큼 다양하게 못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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