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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Sep 05. 2023

나도 잘 모르겠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아침에 일어났는데 순간적으로 멍했었다. '토요일인가?' 아니다. 화요일이다. 출근해야지. 학교에 왔고 아이들과 공부를 했다. 미리 준비해 놓고 간 학습준비물은 사용하지 않고 다른 수업을 했다고 한다. 17명이 등교했다고, 고작 하루 안 봤을 뿐인데 아이들은 밀린 이야기를 쏟아냈다. 수학과 국어를 이어서 하고 지난번에 그리다 완성을 못한 수채화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바닷가에서 파도치는 풍경. 아이들은 파도 부분을 특히 어려워했다. 음.... 이건 내가 우리 반 아이들의 수준을 너무 높이 잡았나 보다. 노을 지는 하늘 풍경을 그려 봤으니 바다 정도는 이제 업그레이드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늘의 구름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고, 바다의 물결 표현하는 것도 어려웠고 바닷가 모래사장과 경계선을 이루는 파도는 그야말로 극악의 난이도였나 보다. 그래도 멀리서 보면 괜찮았다. 가까이서 봐도 괜찮은 작품들도 좀 있었다.


"선생님 살려주세요." "오늘은 아무도 안 살려 줄 거야." 말과는 다르게 나는 한 손에 붓을 네 개를 잡고 아이들이 마무리 검사 단계로 들고 온 작품에 조금씩 덧칠을 하고 물감을 풀어주면서 설명을 해 주었다. "여기는 이렇게 파도 물거품이 연결되게 그려봐." "여기는 하얀색을 엷게 풀어서 경계선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보자." "여기 파도 아래 살짝 그림자를 넣어주면 조금 더 선명해 보인다." "바닷가 멀리 부서지는 물결을 살살 찍어주자." 약간은 마네나 세잔같이 강렬한 느낌의 유채화 같은 수채화도 종종 보인다.


아이들이 다 집에 가고 나서 정말 지도하기가 어려운가 싶어 한 번 다시 그려보았다. 이번에 네 번째 그려보는 바닷가 파도가 있는 풍경인데 사실 내가 그려봐도 좀 쉽지 않기는 했다. 세로로도 그려보고 가로로도 그려보고.... 물거품이 제일 어려운데, 빠르게 하려면 더 엉망이 될 뿐이라서 그냥 맘 비우고 하나하나 점을 찍기 시작했다. 사실은 맘을 비울 구실이 필요했다. 어제 그렇게 집회에서 울고 와서 힘을 내겠다고 했지만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교육부 장관은 우리에게 '선처'를 하겠다고 했다. 이것도 참 우습다. 선처라니. 마치 대단한 아량을 베풀어 너그러이 잘못한 교사들을 관대하게 용서해 주겠다는 것 아닌가? 나는 정말 합당하게 자녀 돌봄 휴가를 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아이 병원과 공개수업, 진학설명회까지 꽉 채웠다. 현장체험학습을 쓴 학부모들에게는 과태료를 물리겠다느니.... 어쩌다 저런 협박을 하고 있는지 마음이 너무 씁쓸했나 보다. 그 마음을 추스를 결이 나지 않아서 하나하나 점을 찍었다. 수채화의 하얀 점은 당시에는 선명해도 시간이 지나면 바탕색이 올라와서 색이 옅어진다. 그 위에 다시 또 점을 찍고 또 찍었다. 드디어 바탕색이 올라오지 않는 점들이 가장 반짝이는 물결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흐려진 점들은 그대로 두면 멀리 있는 물결을 표현하니까 괜찮다. 그렇게 그냥 점을 찍었다. 찍다 보니 마음이 좀 정리가 되어서 사회 자료를 만들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림 그린 시간만큼 퇴근이 늦었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이들에게는 꿈을 급하게 이루려 하기보다는 꿈을 가지고 그 과정을 즐기라고 뀸 자체가 목표가 되지 않게 하라고 말해 놓고선 나도 모르게 뭔가 급한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계속 밀려오는 파도에 쓸리는 것이 힘들었던 것일까. 보통은 아무리 힘든 일도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았는데, 이번엔 좀 오래가고 좀 괜찮아지나 싶으면 다시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안다. 오늘의 침잠을 곧 나는 극복하고 다시 파도를 마주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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