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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을 꽉 채웠을 때 생기는 일

by 여울

지난 연말이었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바빴는데 이게 반은 내가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영어문집을 만들겠다고 방방 뛰어다니면서 모든 일이 시작된 것 같다.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담임 선생님도 아닌데 왜 문집을 만들어?"

그렇다. 나는 담임이 아니고 영어 교과를 맡고 있는데 사실 꼭 영어문집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늘 아이들과 영어 글쓰기를 해 보고 싶어서 1년간 프로젝트처럼 기획했고 그래서 천삼백 편 되는 글을 모았고 이를 추려서 스캔을 뜨고 타이핑을 하고 편집을 했다.


이 과정을 진행하면서 수업 준비를 안 할 수 없으니까 시간을 쪼개고 쪼갰고 초과근무 달지 않고 일을 하고 있노라면 당직 기사님이 오셔서 언제 퇴근하냐고 나 때문에 교문을 잠글 수 없다고 하시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리고 23일 금요일이었다. 그날은 조금 일찍 나갈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 나의 진정한 몰아치기가 시작되었다. 우선 남은 편집을 한다. 그리고 교원학습공동체 일로 선배선생님을 만날 일이 있어서 예전에 근무하던 학교에 다녀와야 했다. 늘 그렇듯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졌고, 다음은 둘째 딸아이와 새로 다닐 학원 상담 및 레벨 테스트를 하러 가야 했다. 나는 학원에 열정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아이가 새로 다니겠다는 학원이 어떤 곳인지는 봐야 하니까. 또 시간이 길어졌다. 저녁 준비도 해야 하니 장터에서 파는 돈가스를 사서 집으로 올라갔다. 다음은 피아노 연습. 그리고 친구까지 만나야 하는 일정이라 서둘러 달려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꽉 찬 일정 속에서 무리하게 나를 당기다가 제대로 넘어져서 양손 바닥과 등이 다 피투성이가 되고 나중에 보니 양 무릎도 까지고 피멍이 들었고 어깨와 팔이 너무나 아팠다. 당장 내일과 모레 피아노 반주를 해야 하는데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미룰 수 없어서 일단 친구는 만났는데 진짜 자책감이 들었다. 말로만 심플하게 미니멀하게! 를 외치면서 정작 내 삶에 계속 뭔가를 비집어 넣고 있잖아?


약을 먹고 겨우겨우 이틀간의 피아노 반주를 소화해 내고는 당분간은 피아노를 안 치기로 했다. 아니 칠 수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통증이 시작되었는데도 병원에 갈 틈이 없어서 문집일을 마무리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병원에 갔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신경이 눌려서 통증이 유발되는 거라고. 늑간근에 충격이 간 거라고. 이 경우는 운동이고 뭐고 한 달은 푹 쉬어야 한다고 하셨다.


아?

새해에는 할 일이 더 많았는데.... 갑자기 한 달의 공백기가 생겨버린 셈이다.

피아노 연습도, 필라테스도, 그리고 아프니까 약속들도 최소화.....


빈틈없이 꽉 차 있던 내 삶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피아노와 필라테스를 들어내니 갑자기 5시간 정도의 여유가 생겨 버렸다. 운동은 이제 안정기 유지기라서 많이 할 필요는 없지만 피아노까지 쉬게 될 줄은 몰랐다.


쉬는 기간. 나는 집을 비운다. 집을 비우면서 공간을 열고 나를 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일들이지만 잠시 멈추고 지금 현재 내가 해야 하는 일, 내게 절실한 일을 먼저 한다.

쉼과 비움.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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