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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할 것 같다

끝없는 책의 향연

by 여울

그렇게 연말에 다치고 나서

일주일 간 잘 쉬면 될 것 같았는데

날마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사실 물리치료를 받는 시간은 좋았다. 매우.


톡톡톡 처음에 주사처럼 놓는 충격은 조금 아팠고 그다음에 두두둑 가볍게 때리는 전기치료부터 시작해서 따뜻한 열 (아마도 레이저) 치료, 석션기기로 압박을 주고 마지막으로 온열팩을 올려놓고 진동하는 침대 위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솔솔 잠이 왔다. 조금만 더.... 하는 사이 끝나 버린다. 아쉽다.


주로 오후에 가면 낮잠을 짧게 즐겼고 오전에는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서 눈만 감고 있었다.


그러나 비싸더라..... 아무리 실손 보험이 적용된다고 해도 드는 비용은 비용.


그리고 방학을 했어도 아이들을 따라다니면서 소위 말하는 '케어'를 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더 바쁜 것 아닌가??!!! 어쩌면 이럴 수가 있지!! 학기 중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자고 낮잠을 잘 시간도 없다. 아마도 그래서 물리치료가 더 소중했나 보다.


이제 어느 정도는 어깨와 가슴근육의 통증이 사라져서 물리치료를 중단했고, 밀린 책 정리를 시작했다.


영어교육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아서 정말 수없이 많은 교재를 사 모았다. 또 엄마표 영어를 진행해 와서 기초 코스북부터 상위 단계 챕터북과 단행본, 시리즈에 내가 개인적으로 읽는 원서들까지 합하면 그냥 작은 책방을 하나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작은 도서관을 해도 될 것 같고. 친구는 우리 집에 와 보더니 영어도서관보다 더 많은 책들이 있다고 했었다...


영어학습용 교재들을 꺼내고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린다. 보통 세 곳에 올린다. 영어원서 중고거래 밴드, 비공개온라인커뮤니티, 그리고 당근마켓. 마지막의 마지막은 개인 블로그이다. 블로그에 올릴 때는 조금 더 가격을 낮춘다. 나를 믿고 구독을 해 주시고 와 주신 이웃님들에 대한 마음을 조금 더 담고 싶어 에누리도 더 해 드리고 택비도 주로 내가 부담한다.


그리고 그 도서 정리는 끝도 없이 이어져서 50만 원 가까이 팔았다. 중고거래를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책을 팔아서 50만 원 가까이 얻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정말 이름만 대면 아노라 할 만한 영어 원서 시리즈 전집들이 집에서 끝도 없이 나왔다.


찰리와 롤라, 리틀프린세스, 아서, 리틀미스, 신기한 스쿨버스 등등등.

보통 오디오시디가 함께 있는 이 책들은 사양에 따라서 기본적으로 몇 만 원부터 10만 원은 껑충 뛰어넘고, 7만 원에 판매한 한 세트는 정가 26만 원이었다. 사실 이 책은 조금 더 가격을 올릴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말았다. 잘 본 책들도 있지만 '상태 최상'이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제대로 안 본 책들이 훨씬 더 많았다. 나는 뭐를 위해서 이 책들을 사서 모았던 것일까.


아이보다 내가 더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더 애지중지 책들을 챙겼다. 그리고 오늘까지 판매한 책들은 앞으로 판매할 예정인 책들의 절반도 안 된다. 훨씬 더 고가의 시리즈와 다양한 단계의 책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리틀 프린세스 시리즈 하나는 책 두 권이 안 보여서 오늘 판매란에 올리지 못했다. 책들이 너무 많으면 얇은 영어 원서 한 두 권쯤은 어디론가 가뿐히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꺼내서 전부 다 있는지 확인하고 깨끗이 표지를 닦아내고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이 과정을 종일 반복하는 날이 반복되니까 이제는 정말 토할 것 같았다. 고작 세 박스의 책들을 처리하면서 너무나 어지럽고 멀미가 나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날들을 거쳐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다가 그냥 눈만 깜빡거렸다.


책들이 세 박스가 빠졌어도 책장에 이중으로 틈새를 메우고 있었기에 별로 표시도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단 빼내었기 때문에 그다음 책들을 정리하고 빼낼 수 있게 되었다. 영어 원서와 함께 한글 전집 시리즈도 곧 들어간다. 사실 아직도 책장을 들어낼 생각을 하면 마음이 '쿵' 내려앉는 것 같다. 이렇게 집착이 크다.


오늘 좀 무리해서 빼내느라 어지러웠어도 다음 정리할 것을 정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소득이었다.


다이어트를 할 때 한 번에 살을 확 빼려고 하지 않았다. 일단 내게는 불가능했고, 그렇게 무리해서 하면 반드시 탈이 날 것을 알았다. 서서히 몸을 운동에 적응시키면서 익숙해졌을 때 식단도 서서히 병행하기 시작했다. 책도 조금씩 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챕터북 4권짜리 시리즈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아직 안 되는 것들도 있지만 그렇게 너무나 아끼는 큰 시리즈들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1월은 이래저래 바빠서 못할 것 같았는데 발을 잘 디디어 냈으니 2월까지 나는 이 공간을 잘 비워내고 아늑하게 정리해 나갈 수 있을까? 대답은 예스. 작은 책꽂이 네 개를 먼저 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큰 책꽂이를 들어내려면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좀 더 필요하므로. 작은 것부터 시작한다. 조심조심. 다독여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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