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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Nov 14. 2023

6학년 아이들과 수채화 1년

그림 잘 그리는 아이가 제일 부러웠던 30년 전의 나. 지금도 이름이 뚜렷이 기억나는 한 친구는 학교 대회는 물론이고 모든 대회를 나가기만 하면 1등 상을 받아오는 친구였다. 예술적으로 재능이 없었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노력하는 일이었다. 피아노도 운동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단거리 달리기는 못해도 장거리 달리기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도 그랬다.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데생이었다. 다만 연필선으로 정말 노력 끝에 그럴싸하게 만들어 놓은 것 위에 색을 입히는 순간 그 노력이 파사삭 부서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보고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는데 감각적인 느낌을 살리지도 못하고 창의적인 부분은 더더욱 난감하기만 했다. 그래서 미술 시간이 두려운 아이들의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그래서 교사가 된 나는 미술 시간을 피하고 싶었다. 나부터도 그림을 못 그리는데 어떻게 아이들을 지도해야 한단 말인가. 반듯하게 따라쓰는 서예는 하겠는데 디자인과 수채화는 정말로 난해한 영역이었다. 한 번은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수채화를 학교 선생님들과 배우려고 했으나 결국 한 번 가보고는 좌절감에 회비만 내다 그만두고 말았다. 그때 산 재료들은 둘째가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아주 잘 쓰고 있다. 그렇게 아쉬움과 동경만 가지고 있다가 우연히 3년 전, 예전 학교에서 멘토 선생님을 따라 수채화의 세계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물을 풀고 색을 입히고 이 과정들을 하나하나 따라 하다 보니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물론 뜻대로 표현이 안 되는 적은 당연하게 많았지만 수채화도 하다 보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피아노도 도레도레 부터 시작하듯 수채화도 가장 기초 접근법이 있는 것이었다. 다만 몰랐을 뿐.


올봄 멘토 선생님은 바빠지셨고 나는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혼자서도 그림을 그리면 할 수 있겠지만 어려운 것일수록 '같이'의 힘이 필요했다. 학교에서 교원학습공동체를 꾸렸고, 6학년 아이들과 수채화 동아리를 하기로 했다. 준비물 목록을 작성하고 커리큘럼을 구성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하는 내용은 조금 비슷하기도 했지만 다르게 갈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그리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또 달랐다. 동아리 수업을 하기 전, 그리고 교원학습공동체 모임이 있기 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관련 자료를 찾아서 정리하고 출력하고 그림을 몇 번씩 그려보면서 집중해야 할 부분과 잘 안 되는 부분을 연습했다.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과도 수채화를 그렸다. 그러니 나는 같은 그림은 많게는 대여섯 번 이상, 적게는 최소 서너 번은 그린 셈이다. 가르치면서 많이 생각했고 많이 배웠다.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 봐야 하듯, 그림도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그려봐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주, 마지막 동아리 활동 시간에 우리는 조금 더 어려운 그림에 도전했고, 전시회를 했다. 액자는 사비로 샀지만 기꺼이 아이들에게 줄만 했다. 1년 간 집중해서 조용히 그림을 그리며 표현하고자 노력한 아이들의 마음이 너무 예뻤다. 그림은 액자가 있어야 완성되는 것을 이번 전시회를 하면서 느꼈다. 그러니 초등학교 시절 작품 두세 개 정도는 액자에 끼워서 보관해도 좋겠지.

"방과후학교 창의 미술부 작품보다 수채화 동아리 작품이 더 예쁜 것 같아요." 점심시간 전시공간을 지나던 ㄱㅂ이가 말했다. 선생님 듣기 좋으라고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봐도 이 정도면 괜찮았다. 


작품을 걷고 그냥 돌려주자니 어쩐지 아쉬웠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아이들 이름을 하나씩 넣고 함께 그려주어서 나에게도 힐링을 선물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더 그리고 싶은 친구는 11월과 12월 하루씩 6교시 이후 그림 그리는 시간을 마련해 놓을 테니 오라고 했다. 우리의 수채화에는 봄 여름 가을은 담겨있지만 겨울을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편지를 써 놓고 나니 편지만 주기 아쉬웠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나는 그만 '풋'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멘토 선생님이 꼭 이러셨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뭔가 주시려고 준비하시고, 그냥 간식이나 선물만 주기 아쉬우니 스티커를 붙이시고 리본을 묶으시고... 내가 같은 입장이 되니까 왜 그렇게 하나라도 더 마음을 담으려고 하셨는지 알겠다. 학용품과 간식을 준비하고 수채화 동아리 친구들을 불렀다. 자기 그림을 찾아가고 하나씩 선물을 가져가고... 그렇게 우리의 1년은 마무리되었다. 


수채화 동아리에는 우리 반 ㅎㅅ이도 있었는데 워터 브러시를 골랐다. 집에 간 줄 알았는데 쓱 다시 돌아오더니 "선생님 여기에 사인 해 주세요!"라는 것이다. 워터 브러시는 플라스틱이고 미끄러운 재질이라 싸인이 예쁘게 되질 않는다. "예쁘지도 않고 다 지워질 텐데?" 그래도 괜찮으니 빨리 해 달란다. 테이프로 붙이면 된단다. 이름을 쓰고 나니 만화 캐릭터 글씨처럼 코믹하다. 그래도 좋다고 싱글벙글 워터브러시를 들고나갔다. 


이번 전시회를 하면서 중입배정원서 작성기간과 겹쳐서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아팠나 싶을 정도로 학교 일에 진을 다 쏟았다. 마지막 작품도 추가로 완성하고 액자는 맞는 사이즈를 구하기 힘들어 여기저기 발품 팔고, 당일날까지 액자에 그림이 맞게 들어가지 않아 다시 그림 자르고 끼워 넣고.. 정말 초보 전시기획자의 빈 틈이 여지없이 드러나서 다시는 전시회를 할 수 있겠나 싶었다. 작품 배치를 마치고 슬쩍슬쩍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대체로 좋았다. 작품을 낸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뿌듯했고, 그림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고 "나도 교학공 같이 할걸." 하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그래도 내년에 이 전시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오늘 아이들과의 만남을 갖고 나니 결심이 선다. 내년에도 나는 수채화를 하겠지. 조금 더 발전된 커리큘럼과 지도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 볼 것이다. 어렵고 감이 오지 않던 수채화의 매력에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퐁당 빠져들기를 바라면서.


교학상장. 이렇게 가르치며 함께 배우며 자라간다. 아. 이 행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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