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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Nov 16. 2023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

그러나 사실은 안 겪으면 더 좋은 것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제는 멀리서 아이들의 기척만 봐도 나한테 올지 안 올지, 어떤 주제로 오려는지 대강 파악이 가능하다. 그리고 보통 이렇게 진지하게 시작하면 무게가 가볍지 않은 법이다. "ㅂㄱ가 저 귀여운 척한다고 뒷담을 깠다고 해요. 그리고 사실 저한테도 다른 아이들 뒷담을 했고요. 쟤는 커서도 연애를 못할 거야라는 식으로요. 남자아이들 대부분 얼평 했어요." 곧이어 몇 명이 더 왔다. 아마도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 듯했다. 몰랐는데 서로서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한테는 A 이야기, 너한테는 B 이야기, 쟤한테는 내 이야기... 이렇게 틀이 짜 맞춰진 것이다. 그럼 물어본다. "너는 어떻게 했어?" "저도 동조했어요."


그러니까 맞춰보면 1학기부터 수시로 뒷담을 깠고, 친구들에게 본인의 책임은 다하지 않으며 누군가가 자신의 몫까지 열심히 하려는 것을 보면 '네가 회장이냐. 나대지 말라'는 식의 기분이 상하는 말을 했으며 친구들의 단점을 죄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렇지만 정말로 그럴까? 아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늘 일방향이기 때문에 ㅂㄱ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일로 며칠간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둘이 남아서 이야기를 하면 좋겠지만 ㅂㄱ는 사정상 학교에 늦게 오는 날이 많고 조퇴하는 날도 많으며 안 오는 날도 많다. 어제도 학교에 오지 않아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가운데 나는 고민을 했다. 아이들은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그럼 수업 끝난 뒤 남아서 서로 이야기하고 마음 풀고 사과하면 될까?" 그랬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그건 아니란다. 남의 뒷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나 신나는 일이다. 누군가를 공동의 적으로 만들어 놓고 나와 듣는 사람을 한 울타리로 묶어서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듣기만 했으니 그 책임으로부터 가벼운 것일까? 동조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맞추기만 한 것일까? 아이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단톡방이든, 학교폭력의 현장이든,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으니 나는 책임이 없는 것인지 말이다. 자신의 속상함을 어필하던 아이들 몇몇은 곧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늘 나는 학교에 온 ㅂㄱ를 교과시간에 조용히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어떤 부분은 자신이 먼저 시작했고 어떤 부분은 동조를 하기도 했다고 했다. 반 전체를 놓고 한 이야기를 나는 아이에게 따로 들려주었다. 내가 이 아이를 조금 더 염려하는 것은 어쩌면 장래에 유명세를 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철없이 친구들과 어울려서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를 한 것이 과장되고 퍼지게 되면 아무래도 쉽게 지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다시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에게 나는 마음을 조금 독하게 먹고 이야기했다. "차라리 지금 이렇게 겪어 보는 것도 괜찮아. 잘 된 것일 수도 있어.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면 더 작은 일이 더 크게 부풀려져서 더 힘들 수 있거든. 그러니까 누군가 들어서 기분이 나쁠 것 같은 말은 아예 해서도 안되고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자리에는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나아."


그리고 내 이야기도 해 주었다. 반 아이들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이 근방으로 전학을 왔는데 그때 좀 많이 힘들었다. 친하던 친구들과 헤어진 것도 슬펐는데 새로 만난 친구들은 좀 적응하기 어려웠고 결정적으로 한 사건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는 아주 친한 두 명이 살았다. 둘의 사이는 너무도 좋아서 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하루는 심하게 다투더니 영영 안 볼 것처럼 사이가 벌어졌다. 문제는 둘이 중간에 있던 나에게 각각 와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A는 B의 흉을 보았고 B는 A의 흉을 보았다. 나는 그렇구나 하고 들었다. 그러다 모종의 이유로 둘이 다시 친구가 되었는데 그때 둘이 서로 나의 흉을 보았다는 것을 또 다른 친구 C가 이야기해 주어서 알게 되었다. 그때 마음을 좀 많이 다쳐서 친구랑 어울리는 대신 책만 보았던 것 같다. 


"나도 친한 친구 여러 명이 있지만 늘 그 친구들의 모든 점이 좋은 거 아니야. A는 정말 다 좋지만 가끔 이기적일 때가 있고 B는 너무도 새침데기 같은 면이 있어. 그렇지만 나는 A에게 가서 절대 B의 안 좋은 점을 이야기하지 않아. 내가 다른 친구의 안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순간 듣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지.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내 흉을 보겠구나.'라고 말이야." 힘들 때, 누군가에 대해서 불만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먼저 엄마에게, 그리고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 일은 여기서 덮기로 하자고. 왜냐면 서로가 먼저 시작한 것도 있고 동조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수업이 모두 끝난 뒤에 당사자들을 불러서 다시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는 서로 같이 잘못했으니 여기서 멈추고 다만 다음에 또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이야기해서 쌓이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집으로 갔다.


살면서 늘 이불킥 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부끄럽고 화끈거리는 그 순간들. 어떤 일이 있을 때 '이래서 속상했어.'라고 내 마음의 아픔을 털어놓는 것과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말을 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의 험담 듣는 것이 불편하다. 그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면 뒤에서 헐어 내리는 말의 소용이 어디에 있는가. 결국 말하는 나 자신도 듣는 나 자신도 같이, 아니 더 깎아내리는 것일 뿐. 




비까지 와서 살짝 우울함이 무게를 더하려는 오늘. ㅇㅂ이의 말을 떠 올리며 웃어본다.

오늘 ㅇㅂ이는 초록색 벨벳 재질의 상의를 입고 왔다. "선생님! 아이들이 저보고 크리스마스 트리같대요!" 쳐다보는 순간 정말로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진짜 트리 같았기 때문이다. "상처 받았어요!"라고 하지만 웃음이 어린 그 표정을 나는 보았다. "아이들이 머리에 별도 달면 되겠대요!" 그래서 나는 별 모양 포스트 잇을 꺼내 주었다. ㅇㅂ이는 세 개를 붙이더니 "3성 장군이다!"라고 외쳤다. "다섯 개 줄까? 5성 되는 거지." "앗 그렇다면 저는 '장수 돌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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