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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Nov 17. 2023

피아노 레슨 한 달만 쉴게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저녁 6시 20분. 오늘 학교를 나선 시각이다. 동학년 회의를 하기 위해 3시 40분경 모인 우리의 회의는 6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학급 수가 많다 보니 서로 나눌 것도 많고 모을 것도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6학년의 11월이 이럴 줄은 정말로 몰랐다. 아니 그랬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나 보다. 6학년 경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금까지의 경력을 합하면 절반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말이다. 회의 도중에 뭔가 싸한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보통 목요일은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갔다.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바로 가서 아이들 저녁을 차려 주고 정리를 하고 7시 좀 넘어서 레슨을 받고 집에 돌아오면 10시 남짓. 지난주에 레슨을 받으러 가서 이번 주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내가 레슨 예약을 했나 안 했나 확실치 않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약 앱을 봤더니 아아.... 8시.... 예약이 되어 있다는 내용이 딱 보인다. 2시간도 안 남은 시점에서 레슨을 취소할 수는 없다. 이번 주에 정말 딱 40분 연습한 것 같은데.... 막히는 사당역으로 차를 가져가기는 정말 싫은데 정말 방법이 없다. 끝나면 9시 반까지 레슨을 마치는 셋째를 또 데리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밥을 먹을 시간도 없어서 오늘 저녁은 동학년 선생님이 주신 쿠키 두 개이다. 뭐 칼로리 높으니 괜찮겠지. 50분 정도 부랴부랴 연습을 하고 레슨을 받았다.


연습한 것은 별로 없지만 슬프게도 레슨은 너무나 좋았다. 끝까지 치는 동안 선생님은 연습 포인트를 끊임없이 적어 내려 가셨고 레슨일지는 빼곡하게 차 버렸다. 또랑또랑한 소리 말고 천천히 깊이 있는 소리를 내려면 손목에 힘을 빼고 손가락을 길게 뻗어서 손가락 끝이 아닌 지문이 있는 쪽으로 쓰다듬어 내리듯이, 그리고 피아노는 현악기는 아니지만 현악기가 서서히 소리가 커지고 작아지듯이 그 강도를 속으로 세면서 올리고 내리기, 손가락 길이가 다르고 위치가 달라서 세 번째 손가락에서 나는 소리가 자연적으로 커지고 넷째 손가락 소리는 작아지고 새끼손가락은 작고 끝에 있다 보니 쨍하는 소리가 나게 되고 엄지와 검지의 손가락 길이로 인한 들쑥날쑥함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는 연습, 쇼팽 시대의 피아노의 특징과 페달링, 그리고 렌토 부분에서 음마다 자꾸 새로 시작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손목을 들어 올리지 말고 손을 옆으로 움직이면서 진행하는 것, 옥타브 레가토에서 간격을 벌리지 않고 어떻게 치밀하면서 이어지는 소리를 내야 하는지, 주요 멜로디를 살리면서 부수적인 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여기까지가 쇼팽 녹턴에 대한 부분이었고 그리고 잠깐 짬을 내어 슈베르트 포핸즈까지. 55분을 꽉 채워서 레슨을 받고 나니 9시다.... 으아.....


"원장님. 저 요새 정말 너무 바빠서 레슨 한 달만 쉬겠다는 말씀드리려고 했거든요?"

"근데 막상 받으니까 못 하시겠죠?" 

"네 흑흑."

그러나 정말로 다음 주는 시간이 1도 없어서 한 주 쉬고 그다음 주 화요일 6시에 퇴근하자마자 가서 받고 오기로 했다. 수목금수목금 수목금 빼곡한 출장과 회의와 회식을 피한 결과이다. 올해 예상치 않았던 새로운 일들을 많이 시작했고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시야와 생각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게 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균형을 잘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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