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울 Dec 22. 2023

인생은 구부러진 길 모퉁이와 같다던 빨강머리 앤의 말

2023년을 돌아봅니다

많은 사람의 최애 책. 나의 인생 책. 십 대 시절 앤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이 외로웠을까. 앤 시리즈 열 권을 정말 셀 수 없이 정독하고 정독했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힘들면 앤 책을 쌓아놓고 하나하나 보면서 시험의 스트레스를 이겨냈을 정도로 앤은 내 삶에 있었다. 수없이 많은 빨강머린 앤에 나오는 글귀 중에서 앤의 딸 리라도 말하는 것이 있다. "어머니는 인생은 구부러진 길 모퉁이와 같아서 매력적이라고 하신다. 하지만 나는 싫다."


리라의 젊은 시절은 전쟁으로 힘든 시기로 시작된다. 오빠들은 모두 세계대전에 참가하러 떠나고 가장 친한 둘째 오빠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연인 케네스 역시 전쟁에 참여해 소식이 없고, 전쟁고아를 맡아 키우면서 온몸으로 격동의 세대를 겪어 나간다. 그러니 고아로 편견과 가난을 이기고 삶을 개척해야 했던 어머니 앤과는 또 다른 도전을 헤쳐나가야 했던 것이다. 


'인생은 구부러진 길 모퉁이'라는 앤의 말은 또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인생은 의미를 갖는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장대하게 서사를 시작한 것은 사실은 별 것 아니다. 올해의 삶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정말로 예상과, 계획과 다르게 지나왔기 때문이다. 올해 초의 목표로 나는 미니멀리즘을 생각했다. 집에 가득 찬 짐들을 줄이고 정리를 하고 그래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고 집중해 보자. 경제 분야를 좀 공부해서 이 가난하고 지지부진한 삶을 탈피해 보자. 이런 생각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짐은 좀 줄이긴 했다. 알고 있었지만 새삼 깨달은 사실은 우리 집에는 책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줄이고 줄였어도 여전히 책이 너무 많아서 올 겨울은 한 번 더 싹 들어내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경제 분야 공부는 관련 책을 좀 읽긴 했다. 다만 '제대로 파고 들어가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정말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생겨서 조금씩 미루다가 2학기부터는 아예 멀어져 버렸다. 


올해 예상치 못했고 그다지 큰 바람도 없이 삶의 방향을 바꾸었던 일들은 모두 '만남'으로 비롯되었다. 

우선, 최리나 작가님의 글을 만나고 그냥 한 번 해 볼까 싶어서 들어갔던 '글로성장연구소'의 별별챌린지는 내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었다. 그전까지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어도 이렇게까지 목적을 잡고 날마다 쓰지는 않았는데, 글을 쓰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 많았는지, 내 삶에 있었던 풀어내고 싶었던 이야기와 내가 앞으로 만들어 내고 싶은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는지 알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마음에 담겨 있던 서러움과 원망-을 다 풀어내진 않았어도 -의 응어리 들은 조금씩 작아져 갔다. 나의 생각을 활자로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함께 글을 써 주시고 나눠 주시는 분들과의 만남으로 삶의 교류가 조금 더 풍부해졌다. 무엇을 하던 같이 하는 사람들이 중요한데 어떤 경우는 잠시 동안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기도 하다가 또 서서히 멀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글벗'들과의 만남은 강렬하지는 않아도 앞으로 은은하게 삶에 스며 지속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피아노가 다시 삶으로 들어왔다. 비록 12월은 잠도 못 자고 일을 해야 해서 잠시 멀리하고 있지만 정체기에 빠져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음악과 피아노가 삶으로 다시 들어와 내게 힘을 주었다. 막연하게 피아노 연습을 하면서 헤매고 있었는데 이제 미약하지만 음악을 생각하고 음악가의 삶과 가치관과 시대가 어떻게 녹아들어 갔는지를 고민한다. 과거의 그 유산들의 힘이, 그들의 고뇌와 치열한 삶의 기록이 느껴져 또 다른 힘이 된다. 러시아 사람들은 식사는 굶어도 저녁이 되면 음악회장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30년 전에 들었다. 정말로 그럴까,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막연한 이야기는 손열음 피아니스트의 책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에서 제대로 확인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홀 근처에는 갈 만한 제대로 된 식당이 없다고. 식사할 돈을 모아서 음악회 티켓을 사기 때문이란다. 유복하게 예술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가진 것이 없어도 예술의 향연을 갈망하는 그 마음. 나는 그 흔적의 자취라도 더듬어 찾아가면서 감사와 희망과 용기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우리 반 아이들. 그리고 학부모님들. 담임이 되면 아이들만 내 삶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의 구성원들까지 함께 들어온다. 그렇지만 올해처럼 이렇게 많은 학부모님들과 이렇게 자주 연락을 하면서 삶이 오버랩된 시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내 삶은 우리 반 아이들과 분리가 되지 않았다. 3월 초에 학교 밖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한 사고로 시작해서 진행되었던 일과 그와는 별개로 조금씩 드러나는 여러 아이들의 아픔과 성장통. 80명이 넘는 큰 학교에서 6학년을 지망한 선생님들이 단 한 명도 없었을 정도로 유명했던 아이들이었다. 심지어 다른 학교 선생님들조차 우리 학교 6학년에 대한 소문을 알고 계실 정도였다. 그래서 올해 6학년 선생님들은 새로 발령받으신 분들과 작년에 왔던 2분과 막내 선생님으로 채워졌다. 모두가 우려로 시작한 2023년은 비록 중간에 아픔을 겪었을지라도 의미로운 일들로 채워져 갔고 이제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만나서 감사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닮아갔다고 느낀다. 우리는 좀 더 자주 많이 웃고 좀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를 닮아서 정리는 좀 못한다. 그래도 집에 갈 때는 기운이 넘친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함께합니다!'와 같은 쑥스럽기 그지없는 구호도 하루에 두 번 잘 말해 준다. 말의 힘. 일 년간 감사와 사랑과 함께의 힘이 조금은 스며든 덕이 아닐까 혼자서만 생각해 보았다. 


내년은 또 다른 프로젝트들이 기다린다. 삶이 어떻게 채워질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감사와 즐거움으로 기꺼이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한 해를 지냈을까 싶을 정도로 거센 풍랑이 일었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마무리가 되어간다.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마무리이다. 인생은 구부러진 길모퉁이와 같아 그래서 또 의미롭다.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응원해 주시는 분들.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The Chair 순수하게 학문에만 빠지긴 어려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