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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Dec 30. 2023

올해 마지막 토요일, 나를 되돌아보다

이불 밖은 위험하니까, 오늘 하루는 집에 있기로 했다. 하지만 밥은 먹어야 하니까 아침을 야무지게 챙겨 먹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왔다. 영화 한 편을 보고 게임도 하고 잠도 좀 잤다.


우리 반 귀염둥이 ㅁㅅ이의 일기 중 한 부분이다. 나는 댓글에 "와! 부럽다. 선생님도 안전한 이불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다! 방학 때를 노려 보겠어!"라고 적어 주었다. 정말 하루는 이불속에서 뒹굴뒹굴하면서 나 혼자만의 이기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눈 오는 아침 풍경을 보면서 누워서 좋아하는 무협소설을 보면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눈 오는 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리고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호사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늦었어, 늦었어!"라며 울먹이는 둘째 목소리가 들려왔지. 아차차... 둘째는 9시 40분에 친구네 차를 타고 같이 미술학원에 간다. 시계를 보니 47분. 친구는 먼저 간다고 문자를 보낸 모양이다. 데려다 달라는 말에 눈 와서 위험한데.... 하면서도 차키를 챙겨서 일단 밖으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다. 지금 막 내리기 시작한 터라 제설작업도 되어 있지 않아 미끄럽고 위험하기만 한 길. 나는 무서웠다. 언덕길을 내려가다 차가 미끄러져 다른 곳을 박을 것만 같았다. 다른 차들이 나가는 것을 보았다. 고민하던 나는 일단 가 보기로 했다. 둘째한테 엄청 뭐라고 잔소리를 하면서 2단으로 올리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막상 큰길로 나오니 길은 다 녹아 있었고 집에 오는 길도 20분 사이에 깨끗하게 다 녹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모처럼 만끽한 토요일 아침의 뒹굴거림이 깨져서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일들을 해 나갔다. 오랜만에 운동과 목욕을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아까 읽다 만 무협 소설을 읽고 그리고 중요한 생각을 좀 했다. '대한민국 교육, 광장에 서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올해는 대한민국 교육사에 한 가지 획을 그을 만한 일이 있었다. 왜 많은 일의 변화는 슬픔으로, 죽음이 발단으로 시작되는 것일까 생각을 한참 했다. 시대는 바뀌어 가는데 그 방향과 방법을 찾지 못해 지나치게 한 쪽으로 쏠리고, 기존의 악습을 막겠다고 세운 것들은 오히려 또 다른 폐단을 불러온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수많은 상처와 스러지는 생명들의 무게가 아프게 다가온다. 그 가운데 이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교육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일어났다. 나는 이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에 대한 단순한 반동으로서가 아니라 정말로 시작될 큰 움직임의 첫 발걸음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원래 문화지체가 항상 발생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변화를 받아들일 때는 시간이 걸린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수많은 희생을 딛고서야 비로소 그 결실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갈 길은 많이 남아 있다. 부정부패와 독선의 걸음에서 우리는 정말로 아직도 자유로운가? 우리의 시민 정신은 정말로 민주주의의 기치를 반영하고 있는 성숙한 자태를 보이는가? 그럼에도 몇 십 년 전보다는 발전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교육이 앞으로도 수많은 희생이 있어야 결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미 충분히 진통을 겪어 왔고 이제는 정말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깊이까지 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란 사람은 어떤지도 보았다. "선생님! 내년에는 한 살 더 먹고 만나나요?" "아니! 이제 만 나이 적용이 되어서 새해가 되었다고 한 살 더 많아지진 않잖아." "아, 맞다. 그랬죠..." 새해가 되면 한 살 더 나이가 많아지면서 어쩐지 켜켜이 쌓인 해의 수만큼 더 성숙해지는 기분이 들어야 할 텐데, 이제는 다 같이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 것 같은 약간의 서운함과 나이를 더 먹지 않아서 사십 대 초반이라고 우길 수 있는 작은 기쁨이 동시에 다가온다. 시대의 정신이 변화되는 데는 시간과 노력과 함께 그만큼의 기반의 축적이 요구되지만 그때가 되면 결국은 움직임이 일어난다. 사람도 그런 게 아닐까. 우리는 항상 역동적인 존재이고 앞을 향해 나가지만 사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당면의 필요만 보고 움직일 때가 더 많아 늘 넓고 깊게 멀리 보고 싶지만 어려웠다. 가끔은 일 년을 길게 보기보다는 하루하루 그저 살아갈 때도 많았다. 마흔 중반에 가까워지니 조금 더 나란 사람이 가고 싶은 방향과 그에 따라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겠다.


올해처럼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이렇게 많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한 어둠일 때도 있었고 눈물 속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안개 속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삶은 알 수 없는 것이 직접적인 도움이 올 때도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 간접적인 도움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일단 살아남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죽음이 너무 아프다. 아마 나처럼 이렇게 직간접적인 도움조차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지쳤을 그 마음들에 또 아팠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더 노력하겠노라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걸어가겠노라고. 그렇게 가다 보면 또 내가 갈 길의 중간 이정표가 나오겠지. 이렇게 하루 조용히 집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마음을 다듬어 보는 이 하루도, 정말 감사하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꽃길만 걷기를 바란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어떤 일이 오던지 잘 헤치고 나가서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을 믿는다고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이 조금의 힘이라도 되면 좋겠다고 그렇게 적었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 우리 모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과정은 힘들 수 있지만 잘 헤치고 나가서 한 해의 마지막에 그래도 잘 지내온 한 해였다는 말을 할 수 있으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아요. 행복한 마지막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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