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학교 운동장에서

by 여울

금요일이다! 오늘은 기필코 일찍 퇴근하리라! 맘을 먹고 열심히 노력했다. 드디어 5시 30분. 퇴근 시간보다 50분 늦긴 했지만 이만하면 6시 전에는 집에 갈 수 있겠다. 도서관에 예약해 놓은 책도 오늘은 꼭 찾아야 한다. 겨울 저녁이 내려앉고 있는 학교 운동장은 이제 거의 빛이 없다. 차도 내 차 한 대만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을 뿐이다. 서둘러 시동을 켠다. 부르르... 르... 르...??????? 시동이 켜지지 않는다. 한 번 더 눌러본다. 부... 르... 르...... 몇 번을 눌러도 소용이 없다. '연료가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반복해서 뜬다.


아닌데? 주유소 갈 만큼은 있는데? 아침에 분명히 확인했다. 24km 더 주행할 만큼은 남아있었다. 그런데 연료가 없다니.... 영하 15도의 추위였던 날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던 연료가 얼어붙었나 보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난감해하는데 순찰하시던 야간 당직 기사님이 오셨다. 빨리 보험사에 전화해서 배터리 충전을 요청하라고 하신다. 마음이 급하니 보험사 전화번호도 찾기 힘들다. 지난 몇 년간 긴급출동 서비스를 한 번도 쓴 적이 없었고 지난 9월 보험사를 변경하면서 더더욱 번호가 없어서 이리저리 검색을 해야 했다. 드디어 전화를 하니 기사님을 연결해 주시는데 시간이 평소보다 걸릴 수 있다고 하셨다. "한파로 인해 긴급출동 요청이 많습니다." 재빨리 큰 딸에게 전화를 건다. "딸아. 도서관 가서 엄마 책 좀 찾아다 줘. 6시에 문 닫으니까 지금 바로 가야 해. 미안." 핸드폰 사용시간 30분 늘려주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5분 전 아슬아슬 도착한 딸아이는 원하는 책 한 권 더 빌려도 되냐고 한다.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 사이 기사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언덕에 있다. 문제는 정문은 언덕 아래에 있고 차단기는 수동으로 작동되어 기사님이 직접 내려가셔야 한다. 15~20분 정도 걸리신다고 하니 교실로 다시 돌아가 있기도 매우 애매해다. 그 사이 운동장은 이제 완전히 깜깜해져 있고 시동도 안 들어오는 차 안에는 나 혼자 입김을 내뿜으며 앉아있다. 본관 건물 4층 교실에 켜져 있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간다. 5반이 꺼지고 다음으로 7반이 꺼진다. 그리고 이제 부장님만 남아계신다. 부장님 교실을 쳐다보면서 약간의 무서움과 외로움을 달랜다.


오늘은 꼭 일찍 가서 따듯하게 집밥을 제대로 차려주려고 했는데.... 이게 뭐람.....그나마 담요와 핫팩이 있었다. 나는 비상 급유 서비스도 신청했다. 3리터까지 무료로 급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가 오늘 드디어 써 봤다. 배터리 충전과 비상 급유는 한 번에 받아도 서비스 두 번이 차감된다고 한다. 드디어 기사님이 오셨다! 먼저 연료를 넣어주신다. 그리고 배터리 충전 잭을 꽂고 나에게 시동을 켜라고 하신다. 덜커덩더러러럭 하더니 드디어 시동이 걸렸다. 정말 감격스러웠다.


기사님이 이제 정문을 잠그겠다고 내려오라고 하시며 휘적휘적 언덕길을 먼저 내려가셨다. "네!" 자신있게 대답하고 창을 보니.... 앞이 안 보이는 것이다. 유리창이 얼어서 하얗게 성에가 껴 버렸다. 와이퍼는 아예 움직이지도 않는데 가만히 보니 차 안쪽에 얼음이 껴 있다. 담요로 문지르는데 닦이질 않는다. 핫팩으로 문지르니 조금 가신다. 기사님이 빨리 내려오라고 전화 주신다. 이 추위에 어르신을 세워 둘 수 없어 윤곽을 가늠하며 조심조심 내려갔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차단기를 통과한 후 교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큰길 주행을 하려면 그래도 앞이 보여야 하니까.


잠시 뒤 이제 유리창이 닦일 정도로 녹았다. 조수석 쪽은 깨끗한데 왜 운전석 쪽에만 살얼음이 끼었을까 생각해 보니 내 입김이 작용한 것 같기도 하다. 30분 넘도록 차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입김이 창에 달라붙어서 얼어버린 것이다. 시동을 30분 간 유지하라고 했으니 이 참에 주유도 해야겠다. 주유를 하고 다시 시동을 켜는데 이번에는 스마트키 배터리가 약하단다. 아... 오늘 왜 이러지.... 추워서 그런가 싶어 스마트키를 주머니에 놓고 살살 녹여보지만 변함없다. 스마트키 배터리는 어디에 있는지 이리저리 봐도 도무지 모르겠다. 스마트키 배터리 교체를 검색하니 나온다. 마트에 가서 수은 건전지를 사야 한다. 겨우겨우 분해해서 수은 건전지를 사서 차에 왔는데 단단하게 포장된 수은 건전지를 뜯을 길이 없다. 뭐 한 번은 작동을 하겠지 싶어 쓰던 것을 다시 끼우는데 인식이 안 된다. 다시 빼고 다시 끼고를 반복하니 시동은 걸리는데 경고음이 울리면서 차 키가 바깥에 있다고 인식이 되고... 아주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렇게 고생 끝에 겨우 집에 오니 8시가 다 되었다. 차로 15분 거리 학교에서 집까지 오는 여정이 이리 험난할 줄이야. 흘끗 거울을 보니 좀 늙어 보이는 것은 기분탓인가?


그래도 정말 다행이다. 기사님도 생각보다 빨리 오셨고 차 문제도 한 번에 해결되었으며 스마트키도 결국 인식이 되어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집에 와서 신랑이 구워놓은 만두를 와구와구 먹었다. 보일러를 강으로 틀어놓고 이불속에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자. 오늘의 교훈. 추운 겨울은 미리미리 연료가 바닥까지 가지 않도록 주유를 할 것. 추운 곳에 너무 오래 세워 놓지 말 것. 그리고 집에 일찍 갈 것. 안 될 때는 아예 대중교통으로 움직일 것.


사족. 스마트키는 작동이 아주 잘 된다. 아직 새 것으로 건전지를 교체하지 않았다. ...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 맞다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