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전까지 가야 하는 곳은 이즈미 홀이었다. 티켓도 구입해야 하니 최소 10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지하철로 가면 30분은 너끈히 걸리고 초행길이니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고민 끝에 택시를 타기로 했다. 첫날부터 지출이 과한 것 같아 마음이 좀 무겁다.
나는 오늘 클래식 음악회를 간다. 기껏 오사카까지 와서 2박3일 일정 중 음악회라고? 서울에서도 가기 힘들었다. 서울에서 웬만한 좋은 공연은 10만 원이 넘어가고 아이들을 놓고 혼자서 밤늦게까지 음악회를 즐기는 것은 사치 같았고 직무유기 같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나는 박물관을 가고 싶었다. 누구나 가는 그런 박물관 말고 조금은 덜 알려졌지만 내실 있는 곳에 가보고 싶었다. 이리저리 찾다가 시립과학관을 가기로 했다. 플라네타리움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휴관이란다. 그렇다면 동양도자기박물관이다. 여기도 휴관이었다. 가고 싶은 곳들은 죄다 휴관이었다. 화가 났다. 아니 어떻게 두 세 곳을 빼고 그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죄다 휴관이란 말인가!!! 오사카에는 문화에 대한 욕구가 없는 걸까?
혼자서 발끈하다가 문득 클래식 공연 생각이 났다. 분명 오사카에도 클래식 콘서트 홀이 있겠지. 그러나 네이버에 아무리 검색해 보아도 오사카 여행에서 클래식 공연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고 공연장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사람도 없었다. 장소 자체가 나오지 않아서 이번에 구글에 osaka concert hall이라고 검색해 보았다. 나온다! 꽤 많이 있었다. 차례차례 들어가서 공연 일정을 확인해 보았다. 아니... 이 큰 홀들에 대관이 없는 날짜가 이렇게 많다고? 우리나라로 치면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LG 아트센터 같은 곳들인데 하루라도 공연이 없는 날을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크고 작은 홀들에서 상시 공연이 열리는데 드문드문 공연 일정이 보일 뿐이었다. 점점 슬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겨우 두 개를 찾았다. 하나는 일본 작곡가의 창작곡 와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연주와 또 다른 하나는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와 피아니스트 줄리어스 드레이크의 슈베르트 가곡 독창회였다.
이안 보스트리지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다. 선이 너무 얇다고 해야 할까. 노래를 분명히 잘하고 해석도 좋은데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 부담스러웠다. 바바라 보니 같은 느낌? 그래서 살짝 망설인 것 하나와 이미 60에 다다른 그의 나이를 생각하니 체력이 달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조금 고민했다. 그래도 보스트리지잖아!!! 재빠르게 최근 그의 연주에 대한 후기를 검색하고는 가기로 결정했다. 일본어를 잘하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남은 좌석이 충분한지 현장 구매가 가능한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티켓 가격도 8000엔이면 진짜 너무 착하다. A석은 6000엔이었다. 그가 우리나라에 최근 독창회를 하러 왔을 때 롯데 콘서트 홀의 좌석 가격이 최저가 십만 원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즈미 홀은 멋있었다. 클래식 애호가들이 풍기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30세 이하의 관람객들은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부러우면서도 약간은 씁쓸한 것은 젊은이들은 클래식을 선호하지 않는구나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과연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대다수였다. 좌석은 조금 남아있었다. A석은 2층의 가장자리라서 제외하고 S석 중 왼쪽 앞자리를 골랐다.
그리고 이제 음악회 시작. 나름 슈베르트의 가곡들은 웬만하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음악회에서 와장창 깨졌다. 세상에. 조금 들어봤다 싶은 곡은 두어 곡뿐이고 나머지는 생전 처음 듣는 곡들이었다. 백조의 노래, 겨울나그네 같은 유명한 연가곡 말고도 내가 알고 있는 노래들이 꽤 많단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처음인 것 같은 곡들이 많은지 난감해졌다. 가사를 자막으로 띄워주는데 일본어다. 일본어를 독학으로 했지만 손을 놓은 지 오래라 읽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한자에 의존해 대강대강 뜻을 파악했다. 가사를 재빠르게 찾아보려고 했지만 공연장에서는 핸드폰 외부 접속이 차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황홀했다. 음색과 전달하는 방식이 어찌나 섬세하고 아름다운지 그냥 저절로 매료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음색은 좀 더 중후해지면서 깊어졌고 음악적 해석 또한 더욱 풍부해진 것 같았다. 반주를 하는 줄리어스 드레이크의 섬세한 타건 역시 눈부셨다. 내가 요새 슈베르트를 쳐 보니 정말 세상 어려운 것이 슈베르트인데 너무도 가볍고 부드럽게 표현하는 그 움직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에는 피아노 관련 굿즈들을 구경했다. 하나씩 다 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내가 노다메 피아노 가방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며 피아노 장식 고리는 이미 집에 있고 피아노 우산은 비행기에 들고 타기엔 너무 길었다.
2부가 시작되었다. 앞 좌석에 앉아 있던 꼬마 남자아이는 쉬는 시간에 마리오 메이커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졸기 시작했다. 머리를 등받이에 꽝하고 부딪히기도 했다. 엄마가 서둘러 제지하는 모습도 보였다. 역시 좋았던 2부는 그렇게 지나갔고 마지막 음이 끝나도 박수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피아니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제야 열렬한 박수가 울려 퍼졌다. 앙코르가 한 곡, 두 곡, 세 곡, 네 곡까지 반복되었다. 감사하게도 앙코르는 유명한 곡들로 해 주었다. 디 포렐레와 안디 무지크, 안디몽트 같은 곡들이라 즐기기 쉬웠다. 안디 무지크가 나올 때는 그냥 눈물이 흘러나왔다. 제럴드 무어가 은퇴무대에서 마지막으로 연주하기도 했던 그 곡.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과 평화와 감사에 대한 마음.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마음속 깊이 들어오는 '음악에 붙임'의 여운. 자꾸 눈물이 흘러나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실은 마지막 곡이라고 생각했다. 관객들은 상당수 기립했고 나 역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한 곡을 더 했다. 그렇게 들은 곡이 'An die mond' '달에 붙임'이다. 잔잔하게 펼쳐지는 달빛과 같이 퍼지는 피아노 반주에 움직이는 서정적인 노래의 선율. 아 좋다. 진짜로. 오늘 여기 오길 너무너무 잘했다.
일본 관객들은 단 한 사람도 먼저 문을 나서지 않았다. 사인회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먼저 나가서 줄을 서는 사람은 없었다. 앙코르와 브라보를 외치지도 않고 그저 열심히 박수만을 쳤을 뿐이다.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감동을 표현하는 모습도 나는 꽤 괜찮았다. 망설이다가 사인을 받으면서 이야기했다. 한국에서 왔고 오늘 오사카에 온 첫날이다. 공항에서 오자마자 바로 공연장에 왔고 음악이 너무 좋아서 좀 울었다. 감사하다. 당신 책과 음반은 모두 한국에 있어서 가져오지 않았다. 등등. 작년에 한국에 오긴 했지만 짧은 협연이었다.
공연을 감상하고 나오는 길, 원래는 스카이 빌딩에 가서 야경을 보려고 했지만 네 곡의 앙코르와 사인으로 인해서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냥 가도 되었겠지만 이상하게 지하철로 향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생각해 보니 오사카조홀에서도 공연이 있었다. 이대로는 그냥 지하철만 기다리다 끝이 나겠다 싶어 그냥 다른 지하철로 향했다. 오사카성의 야경이 보였다. 처음 보는 오사카 성의 야경은 아름다웠고 그 자체로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