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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Mar 21. 2024

뭐든지 시간이 답이다

요사이 계속 잠을 못 잤다. 못 잤다기보다는 늦게 잘 수밖에 없었다. 학부모 공개 수업과 총회를 앞두고 이리저리 준비할 것도 많았고 집에 와서는 할 일도 많았다. 집을 치우고 씻고 나면 1시는 훌쩍 넘었고 낮에도 잠깐 졸 수 있는 틈도 없었다. 


학부모총회까지 마치자 그래도 마음이 풀어졌다. 1학기의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를 마쳤으니 이제 학부모 상담 주간만 지나면 된다. 미뤄두었던 수업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똑똑 소리가 들린다. 아차차. 당직 기사님이 확인차 들리신 거다. "제일 늦게 가시는 선생님!" "저 오늘은 일찍 갈 거예요. 10분??" "괜찮아요. 천천히 하시고 가세요." 주차장이 좁아서 운동장 한편에 주차를 했기 때문에 내가 차를 빼야 정문을 잠그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갈 준비를 한다. 초과근무도 안 달았는데 벌써 6시 40분이다. 집에 오니 7시가 넘었고 아이들 저녁을 만들어 집에 오는 순서대로 차려주니 8시가 넘었다. 


잠깐 한숨을 돌리면서 캐시를 준다는 웹툰을 클릭해서 휙휙 스크롤을 내리는데 황금빛 석양이 내리는 바닷가 장면이 눈을 사로잡았다. 강렬하게 채운 그 눈부신 금빛에 사로잡혀 정말 오랜만에 그림이 너무나 그리고 싶어졌다. 9시 경제강의 전까지 잠깐 시간이 있으니 30분 정도면 되겠거니 싶었다. 한 가지 살짝 염려가 되었던 것은 수채화에서 노란색을 원하는 대로 표현하기는 참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잘 될까 걱정이 앞섰지만 그렇기에 미루고 미뤄두었던 노란색 계열을 한 번 제대로 시도해 보고 싶었다.


하늘은 이미 여러 차례 그려 봤으니 새로운 색으로 시도한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쉽다. 문제는 바다. 물을 깔고 하나하나 풀어가 본다. 이 색은 섞이지 않고 이 색은 투명하게 풀어지고 10가지 정도를 이리저리 실험해 보았다. 대강 표현했는데 너무 엉성하다. 깊이라고는 1도 없는 그냥 연한 노랑바다가 어설프게 펼쳐져 있었다. 굵은 붓은 치우고 00호와 2호짜리 세필붓을 들고 하나하나 점을 찍고 최대한 가늘게 선을 그린다. 맨눈으로 하고 싶었는데 잘 보이지 않아 결국 안경도 꺼내 썼더니 조금 더 세세하게 보인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연한 갈색으로 점을 찍고 선을 그리고 조금 더 진한 반다이크 브라운을 쓰고 페인즈 그레이를 섞으며 레드에 버밀리온... 그리고 다시 살살 물로 경계선을 풀어본다. 수채화 샘플이나 강의가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사진뿐이니 혼자서 해결하는 방법뿐이다. 같은 물감으로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려도 다 다른 느낌의 작품들이 나온다. 나는 물을 많이 써서 경계선을 뚜렷하지 않게 하는 기법을 좋아한다. 자연스럽게 색이 섞일 때가 제일 좋다. 


이렇게 하다 보니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아서 카톡을 확인하는데 녹화본 이야기가 나온다. 음? 시계를 보니.... 오노..... 10시 반이라고? 언제 두 시간도 넘게 지난 거지? 난 정말 슬펐다. 맞다. 이래서 내가 한동안 그림을 못 그렸지. 작년 12월 초 이후로 붓을 잡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너무나 좋은데 마음에 차는 순간까지 색을 탐구하고 어떻게 그릴지 이리저리 생각하며 하나하나 선과 점을 찍고 다시 물로 풀고 닦아내는 과정을 하다 보면 1시간은 우습게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실력이 모자라서 시간이 더 들어갈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시간을 들이면 실력의 부족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감춰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시간이 답이었다. 지금 치는 쇼팽의 녹턴 48-1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 가는 것 같고, 영어 공부는 5년이 넘어간다. 조금 잠깐 해서 금방 완성이 된다면 너무 좋겠지만 그런 것은 별로 없다.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고, 처음부터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서투른 대로 하나씩 그렇게 건반을 누르고 붓질을 하고 책을 읽어 본다. 그렇게 켜켜이 쌓이고 쌓인 것들이 또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그렇게 쌓아가서 내일의 나가 되겠지.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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