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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pr 03. 2024

그림 같은 아이들

활기와 고요 사이에서

지난주 학급 회의 시간이었다. 좋았던 점, 아쉬운 점, 바라는 점 등을 적어 보았다. 그중에서 아쉽고 바랐던 것에 공통으로 많이 들어간 한 가지는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나도 요사이 느끼는 부분이기도 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그림'같은 아이들이라는 표현이 있다. 오랜만에 복직해서 처음 이 표현을 들었을 때는 무슨 뜻인가 싶었다. 아이들이 그림 같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보통 선생님 말을 잘 듣고 조용히 얌전히 지내는 아이들에게 쓴다는 것을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그림 같다는 것은 칭찬인가 아닌가. 교사의 지도력이 그만큼 우수하다는 뜻인가.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아이들의 특징이 잘 안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치솟아 올랐다. 생각해 보면 그림 같은 아이들을 지도할 때는 에너지 소모가 훨씬 덜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그림 같은 아이들을 원하지 않는다.


올해 아이들은 작년 아이들보다 더 순수한 느낌이었다. 반응도 이해도도 행동하는 것도 말도 뭐든지 조금 더 해맑음이 묻어났다. 처음에는 너무나 고요한 교실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아이들이야 말로 내가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그림 같은 아이들인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허니문 기간도 끝났겠다 (작년에는 허니문 기간이 아예 없었다...) 서서히 수다가 교실을 잠식하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둘이면 잡아채기 쉬운데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니 이리저리 두더지 잡는 것도 아니고 나도 슬슬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떠드는 것은 괜찮지만 목소리 데시벨을 낮추어 속삭이는 정도로 해야 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폐활량과 발성이 탁월한 아이들이 조절이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사건은 벌어졌다.


과학실에서 과학 교과 수업을 듣고 온 어제, 회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 과학실에서 너무 시끄러워서 수업을 듣기 힘들었어요." 과학선생님은 천사표 남자 선생님이시라 그 풍경이 어떠했을지 눈에 보였다. 진지한 얼굴로 물어봤다. "과학실에서 떠든 사람 스스로 일어나 보세요." 무려 7명이 일어났다. 본인들은 머쓱한 얼굴로 잘못을 시인했다. 그 가운데 우리 반 목소리 큰 한 아이가 안 보이길래 물어보니 본인도 같이 떠들고 싶었으나 코가 너무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했지만 며칠 째 쌓인 것들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여기에 결정타를 입은 꼴이 되었다. 문제는 과학 다음이 체육이라는 점이었다. 원래는 운동장에 나가서 활발하게 뛰어놀아야 하지만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가고 싶지도 않았고 이 기분으로 아이들과 몸으로 부대끼며 운동장에서 뛰고 싶지도 않았다. 


"모두 국어책 꺼내세요." 나는 어쩌면 제일 안 좋은 방법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국어를 공부한 것도 아니고 제일 뒤에 있는 글씨 쓰기 연습을 하겠다고 했다. 공부가 벌이 되어 버린 셈이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화난 얼굴을 보이지도 않았고 다만 냉정하게 글씨 쓰기를 3까지 하라고 했다. 그리고 국어 수업에서 재구성하느라 건너뛴 교과서의 이야기 부분을 읽고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보는 것까지 시켰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아이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글씨를 썼고 나는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다음 시간은 영어 시간. 영어 선생님이 오시더니 너무나 조용한 분위기에 당황하시며 "Did you have a P.E. class? Are you so tired?"하고 친절하게 물어보신다. 아이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교실문을 닫으면서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싶은 마음으로 교사연구실로 갔다. 


우리 학교는 서울시 안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학교라서 일주일에 운동장은 딱 한 번, 체육관도 딱 한 번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소중한 운동장에서의 한 시간을 아이들이 얼마나 기다리는지 알고 있는데, 이렇게 보내버렸으니 기분이 정말 별로였다. 사실 운동장에 나가지 않는 선생님도 계시기 때문에 6교시는 운동장이 비어 있을 확률도 높아서 마음만 먹으면 데리고 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다른 활동을 하기 위해서 6교시에는 노트북을 예약해 두었고, 그래서 결국 야외 체육 수업은 없는 것이 되었다.


집에 와서도 기분이 안 좋았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기분이 안 좋았다. 체육을 한 번 빼먹었다고 나쁜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대응하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제일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등교해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의 의미를 짚어 보았다. 수학여행 때 만난 일본 학생들이 보여준 박물관에서의 태도와 우리나라 학생들의 모습도 이야기해 주었다. 거침없이 떠들고 자유롭게 다니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모습과 조용히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조심 지나가던 일본 학생들의 모습.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분명히 이야기는 했다. 선생님이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고. 학기 초에 교과 시간에 특히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교과를 해 봤기에 교과 교사의 고충을 안다.) 어디서든 우리 반 아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담임 선생님이, 그리고 부모님이 어떻게 가르치고 키우셨는지를 알려주는 척도라고. 뜨끔해 보이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재미있게 잘 쓴 ㅈㅇ이의 일기를 읽어 주자 아이들의 긴장이 풀어졌다. (같이 긴장을 푸는 의미에서 일부만 적어 본다.)


1달간 짝을 한 ㅎㅅ는 좋은 친구였고 싫은 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상 헤어지자니 딱히 아쉽지도 않았다.... 나는 요가하듯 몸을 비비 꼬며 좋은 짝을 뽑게 해 달라고 빌었다. 내가 하도 간절히 빌고 있자 ㅎㅅ가 말했다. "너는 아무나 되어도 상관없다면서 뭘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니?".... 드디어 뽑았다. 내 자리는 11번.... 망했나....ㅇㅇ이다!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슈프리모 땅콩 슈퍼 울트라. ㅇㅇ이는 원숭이처럼 몸을 비틀면서 기뻐했다. 우리 둘은 수업을 즐겁게 들었다. 


또 다른 두 편의 일기는 같이 놀았던 두 친구가 각각의 시선으로 일기를 썼는데 그 부분이 또 재미있었다. 한 명의 시선으로는 아주 감동적인 나들이였고 좋은 추억이었다. 다른 한 명의 시선으로는 재미는 있었으나 예상과 달라진 지출 덕에 친구 것까지 같이 사 주느라 본인의 비상금을 탈탈 털어야 해서 약간은 가슴이 쓰린 추억이었다. 


이렇게 일기를 읽고 나니 아이들의 굳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지 화를 내거나 딱딱하게 있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업을 했다. 수학 수업도 재미있게 했다. 어제 못한 체육 수업도 땀을 흘리며 열심히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어 수업을 했는데 주사위를 활용한 질문 만들고 답하는 아주 재미있는 놀이 수업이었다. 질문을 만드느라 까르르 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주사위를 굴리고 답하며 미션을 수행하느라 시끌벅적한 가운데 아이들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이렇게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들으니 그제사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다시 밥 먹으러 갈 때, 복도를 지날 때 우리는 조심조심 수업 중인 다른 학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용히, 조심해서 걸어갔다. 내일은 또 어쩔지 모르겠지만 서로서로 조심하고 배려하는 마음. 노력하는 태도면 되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더라도 글씨 쓰기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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