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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pr 04. 2024

미술 시간이 반갑지 않은 아이들과 그림 그리기

올해도 동아리는 수채화부로 정했다. 사실 필라테스나 영어활동 동아리를 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그냥 수채화를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올해 아이들과 새로 해 보려는 프로젝트가 많은 상태라 동아리까지 새롭게 하려면 너무 정신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작년하고 똑같은 커리큘럼을 가지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 보니 아쉬운 부분과 보충하면 좋을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기본기부터 조금 더 탄탄하게 잡아가 보기로 했다. 작년에 해 보니 붓 잡는 것도 어렵고 물 양 조절하는 것도 어렵고 물감 농도 조절하는 것도 어려워했다.


매 학년 동아리 첫 시간은 부서 정하기이다. 작년에는 나름 수채화부가 인기 부서였는데 올해는 어쩌면 이렇게 원하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지 다소 상처까지 받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부서를 생각해 보면 일러스트컬러링과 같은 미술 관련 부서가 수채화부 말고도 세 개나 더 있었다. 수채화는 사실 귀찮다. 정리하기도 귀찮다. 물도 버리고 붓도 씻고 팔레트도 정돈해야 한다. 거기에 이런저런 준비물이 많으니 간단하게 색연필과 사인펜만 있으면 되는 일러스트부보다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나도 가끔 물 받고 도구 펼치기가 귀찮을 때가 있는데 아이들은 오죽하랴. 


거기에 한참 활동적인 에너지가 넘쳐날 아이들에게 가만히 앉아서 그림만 그리는 것은 또 쉽지 않다.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마음껏 뛰어놀고 싶은 남자아이들은 울상이다. 오늘도 정말 발랄하게 아무것도 없이 들어온 남자아이가 한 명 있었다.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 후 물어보았다. "저는 가위바위보에 져서 어쩔 수 없이 왔어요. 하는 친구 손 한 번 들어 보세요." 다섯 명이 손을 들었다. "그냥 수채화가 너무너무 싫은데 왔다 손 들어 보세요." 3명이 손을 들었다. 아까 그 발랄하게 들어온 남자아이는 "수채화 부만 아니면 된다 했는데 여기로 왔어요."라고 아주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탁구부나 보드게임부에 가고 싶었는데 졌구나?"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하다. 나도 그냥 보드게임부를 했으면 인기만점이었을 텐데 왜 굳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해서 너희들에게 이 고통을 안겨주었나....


"저는 수채화나 그림을 좀 그려 봤어요. 하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 했더니 반 이상이 자신 있게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작년 경험 상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가끔 나보다 잘 그리는 찐 미술인들이 나타나지만 대부분은 물감농도 조절부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작년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왔다는 아이들만 아니면 오늘부터 바로 그러데이션에 들어갈까 싶었는데 안 되겠다. 기초부터 한 번 잡고 가야지.


먼저 wet on wet 기법을 공부해 본다. 바닥에 투명하게 물을 깔고 연한 색을 절반 올리고 진한 색을 나머지 절반에 올려 자연스럽게 섞이게 한다. 한 번 더 해 보는데 두 번째는 깨끗한 물을 묻힌 붓으로 살살 풀어주면서 그러데이션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되도록 한다. 세 번째는 wet on dry 기법이다. 물을 칠한 후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도록 한다. 기다리는 동안 선을 그리고 작은 덤불을 두 가지 기법으로 그려본다. 


대단한 것을 한 것도 아니고 엽서 크기 종이를 6등분 해서 조금씩 칠했을 뿐인데 이제 3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보니 기초부터 하길 잘했다. "아니, 아까 그림 좀 그려 봤다는 친구들 어디 있나요?"하고 농담처럼 이야기했더니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대답한다. "선생님! 저희는 좀 그려봤다고 했지 잘 그린다고 하진 않았어요!" 오늘 배운 내용을 정리하고 다음 시간에는 다양한 색으로 그러데이션 연습을 해 보겠다고 했다. 혹시 연습하고 싶은 아이들은 수채화 종이를 가져가도 좋다고 했더니 6명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받아갔다. 실제로 할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받아가면 기특하다. 작품까지 놓고 가면 마음이 아프다. 잘 가지고 가서 A4 파일에 끼워 두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들고 가긴 했다. 


돌이켜 보면 나도 미술 시간이 싫었다. 알아서 척척 잘 그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유일하게 잘할 수 있었던 것은 데생이었다. 연필선으로 명암을 넣다 보면 그럴싸했지만 색칠을 하는 순간 그림은 그저 부끄럽기만 했다. 어른이 되었더니 선생님들끼리 모여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때도 돈만 내고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정작 갔을 때는 잘 그리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핀잔도 들었고 어떻게 붓질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으니 "이렇게 하세요."라면서 대신 쓱쓱 칠해주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수업이었다. 그 후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때 사 둔 물감은 17년 가까이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3년 전 같은 학교 선생님을 통해서 하나하나 배우면서 비로소 그림이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색을 풀어가는 법,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법, 펜을 사용하는 법 등등 못해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는 선생님 덕에 더 신이 났었다. 감성을 표현하는 것에는 큰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내가 배운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미술 전공도 아니고 그림을 어려서부터 잘 그리거나 뛰어난 관찰력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할 수 있었으니 같이 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아직도 붓을 들고 물감을 찍으면 긴장이 된다. 그래서 연습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전에, 선생님들께 설명을 드리기 전에 미리 몇 번이고 연습을 해 본다. 그림자료를 찾아보고 관련된 영상자료를 찾아보면서 공부하고 연습을 한다. 그래도 잘 안 된다. 그래도 계속한다. 전문가의 완벽한 솜씨는 아닐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그림은 나온다. 마스킹테이프를 떼기 전까지는 허접해 보이는데 막상 떼어내면 생각보다 괜찮아 보일 때가 있다. "선생님 잘 가르쳐 주신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어제 배드민턴을 치러 갔다가 다른 선생님께 들었다. 내가 뭘 얼마나 잘 가르치겠는가. 이건 다 좋게 봐주신 작년 선생님들 덕이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 보니, 내가 그림을 어려워했기에 초보자의 마음은 초보자가 안다고, 그래서 정말 기초부터 할 수 있었겠다 싶은 것은 있다. 원래 천재는 다른 사람 잘 못 가르친다고. 


미술 시간이 싫은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는 것은 대체로 흥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으로 불과 12번이 남았을 뿐이지만 조금이라도 익숙해져서 미술 시간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최소한 너무 싫어서 부담스러운 과목이 아니면 좋겠다. "한 시간이 너무 금방 지나갔어요." "우와, 시간이 이렇게 간 줄도 몰랐어요."라는 아이들의 오늘 소감이 들려온다. 하얀 종이와 나만 존재하는 시간. 그 기쁨도 알아차릴 수 있으면 좋겠다. 

다음 주에 해 볼 예시 작품을 하나씩 미리 그려 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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