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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pr 12. 2024

오늘 나는 기분이 꽤 괜찮다

평소와 같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수다스러웠고 일정은 빡빡했으며 잠깐 눈을 감을 시간도 없이 열심히 자료를 만들고 수업을 했고 내가 맡은 여러 가지 역할을 이리저리 수행했다. 똑같은 일을 똑같은 패턴으로 해도 지치고 짜증이 올라올 때가 있는데 오늘은 달랐다. 왜 그런 것일까 생각해 본다.


1. 좋은 만남이 있었다.

사람들이 다 E라고 생각하고 아무리 MBTI검사를 여러 번 해도 E라고 나오지만 사실은 나는 I에 가깝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혼자서 뭔가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서 책을 읽고 혼자서 피아노를 치고 혼자서 음악을 듣고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혼자서 글을 쓰고 혼자서 운동을 한다. 친구를 만나도 일대일로 만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고 온 날은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말없이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보거나 누워서 나를 진정시킨다.


그럼에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어제는 졸업한 아이들이 찾아왔다. 보고 싶다고 전부터 오고 싶다고 했는데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서 겨우겨우 어제 만났다. 교복을 입고 뭔가 달라진 분위기를 폴폴 풍기며 쓰윽 나타난 명의 아이들을 보니 반가움과 감동이 함께 몰려왔다. 동학년 회의 중이라서 아이들에게 일단 교실에 있으라고 알려 주었다. 아이들은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선생님 손목을 지키라고 마우스 손목 받침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선생님을 위한 드로잉 패드와 캘리그래피 북, 그리고 깜장색 머리끈 뭉치까지. '다이소'가 딱하니 찍혀 있지만 무슨 상관이람. 나는 수채화를 전문으로 그리기 때문에 종이는 함량이 높은 300g 이상의 고급 용지를 쓰지만 아이들이 들고 이천 원짜리 드로잉 패드에 담긴 마음은 가격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상대를 알고 생각하면서 선생님에게 무엇을 들고 올까 고민했을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눈물까지 나올 만큼 고마웠다.


아이들과 떡볶이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보냈다. 어떻게 생활하는지 조잘조잘 떠드는 목소리와 환한 웃음을 보고 있으려니 내 마음까지 봄빛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막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할 곳이 마땅치 않다. 유치하지만 오늘 아침 우리 반 아이들에게 자랑했다. 사실 내 마음은 '너네도 내년에 놀러 오렴.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줄게.'인데 바로 방송교육이 시작되어서 미처 말도 다 못 했다. 요새 한참 말이 많아지는 우리 반 아이들이 내년에도 이렇게 전년도 제자들처럼 와서 함께 이야기와 삶을 나누어 주면 좋겠다. 정말로.


 2. 맛있는 밥이 있었다.

작년에 급식 대소동이라는 글을 썼다. 나는 그리 나쁘지 않은데 급식을 두고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이 말이 많았고 결국 영양사 선생님은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셔서 명예퇴직을 하셨다. 그리고 새로운 영양사 선생님이 오셨는데, 나의 다이어트의 강적이 되셨다. 아이들 입에서 날마다 "급식이 너무 맛있어요."라는 말이 나오고 다시 받으려는 줄이 날마다 길게 늘어서 있다. 아침을 버터 바른 빵 한 조각으로 간단하게 먹고 저녁도 정말 간단하게 먹는 나로서는 점심이 유일하게 제대로 챙겨 먹는 순간이다. 그 점심이 꽉 차게 맛있으니 음식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이 행복한 기대감으로 점심시간이 날마다 기다려진다. 거기에 오늘 저녁은 친구랑 모처럼 맛있는 고기를 제대로 챙겨 먹었다. 식사 후 커피는 제대로 향이 풍부한 드립 커피를 잘하는 카페에서 즐겼다. 드립 커피의 향과 맛을 알게 되니 그냥 일반 커피는 아쉬운 감이 있었는데 검색해서 찾아간 곳은 정말 맛있었다. 거기에 커피와 잘 어울리는 초코칩 쿠키까지 마무리로 같이 먹으니 만족감 최고였다. 역시 사람은 잘 먹어야 한다.


3. 주도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친구와 밥을 먹었으나 그 이후의 시간은 알차게 잘했다. 셋째를 레슨 장소에 데려다주고 잠깐 필요한 장을 보고 나서 아이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고 필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내일 해야 할 일을 알맞게 조정한다. 일들은 늘 한가득 많지만 거기에 끌려다니면서 마지못해 하지 않았다. 하나씩 무리하지 않게 정리를 하고 하나씩 기쁨과 감사로 마무리해 간다. 고민이 있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어떤 피드백을 주고받을지 생각을 하고, 동시에 우리 집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이리저리 조각을 맞춰간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만나고 잘 생각하고 할 일을 잘해 냈다. 매일이 오늘 같은 건 아니다. 똑같은 일상이지만 몸이 너무 처지고 뭘 해도 마음이 울적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기다린다. 비슷한 패턴을 유지하면서 나 자신을 잘 챙겨주려고 한다. 그럼 오늘 같은 하루를 선물 받기도 한다. 내일은 또 어쩔지 모르겠지만 이런 날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떤 날이 와도 잘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자기 전에 후다닥 남아 있는 집안일에 마지막 에너지를 쏟고 깊은 잠을 자러 가자. (글을 쓰기 전에 집안일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가끔은 순서가 바뀌기도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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